▲ 강병철 작가 |
우선 그 많은 분량의 분석이 객관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가령 오백 편의 논술이 있다면 맨 첫 번째 논술과 사백 번째 이후에 보는 논술 채점의 정확도는 공평하기 힘들다. 교수들끼리의 사고의 폭도 다르고 가치관과 직관도 저마다 다르다. 채점관과 수험생의 의식 상태역시 마찬가지다. 상반된 논제 앞에서 심판관의 가치관 여하에 따라 벼랑 끝으로 떨어진다는 현실이 얼마나 으시시한가.
한 인간의 역정이 심사관과 철학적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벼랑 끝에 서게 된다면 얼마나 가혹한가 (사법시험 3차 면접에서도 ‘주적 개념’으로 몇 인재가 떨어지지 않았던가). 또한 외피의 포장 문제다. 논술의 글씨나 면접의 말씨나 타고난 외모와 맵시에 따라 작용될 플러스 알파의 문제다. (이미 회사 채용에는 꽤 보편화된)논술 채점 기준 역시 그 구도를 파악하는 도면일 뿐 나머지는 대개 읽는 사람의 직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니 교사들은 남들과 다른 시각만을 제시하게 된다. 소위 튀는 사고를 찾아내야만 점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의 특이성이 곧바로 창의성과 연결된다는 것이 억지 논리다. 보편타당한 진리는 상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기실 대부분의 일상에서의 정답이다. 그러니까 논술에서 유별난 해법찾기는 가상의 거짓 신화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허구의 전설화다. 콜럼버스는 껍데기를 까서 달걀을 세우지 않았고 에디슨은 알을 까기 위해 3주간 외양간에 들어간 적이 없으며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를 외치며 발가벗은 몸으로 목욕탕을 뛰쳐나온 적이 없다. 다만 그 무수한 관념성 신화로 보편성과 차별화시킬 뿐이다.
학원의 논술은 입시에 발을 못 붙인다는 대학 측의 장담도 억지다. 인간의 사고는 그 때까지 살아온 신산고초(辛酸苦草) 이고 논술은 글의 틀로 맞추는 과정이다. 학원 논술과 학교 논술이 따로 국밥처럼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논술은 각 교과의 특성을 연결시키는 교육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글과 삶을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면 된다. 유별남과 기발함의 카오스는 작금의 행정문서처럼 돌출성 외피만 남발시켜 세상을 혼돈스럽게 한다. 바르게 쓰는 글은 사람을 섬기는 데 쓰이고 그릇되게 배운 글은 사람들을 부려먹는데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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