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영덕 벧엘의 집 전도사 |
내가 섬기며 봉사하는 벧엘의집은 쉴 곳 없고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많은 이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쉼을 선사하고 치유를 경험하게 하고 자활의 기반을 조성하여 주는 일을 하고 있으며 이 일이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간혹 이러한 우리의 믿음을 불신하고 힘을 빼는 소리를 하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노숙인들은 도와줘봐야 헛일이고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더욱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게 만든다고 지적하신다.
개중에 어떤 분들은 벌컥 화를 내시기도 한다. 씁쓸하다. 나의 신념이 누군가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거리가 된다는 건 유쾌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반갑지 않은 기분은 잠깐이다. 지금 내가 함께 하는 아저씨들을 떠올리면 그러한 기분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만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이 우리 사회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아저씨들에게 마지막으로 기댈 구석이 된다는 것만으로 그저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르지만 가끔 대전역 급식 봉사를 온 학생들이 배식을 하면서 나를 노숙인 아저씨들과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도사님~! 밥 먹으러 온 노숙인 아저씨인줄 알았어요~!”
이 말을 내뱉은 친구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그런데 사실 난 이 말 듣기를 무척 좋아한다. 나만의 생각이지만 내가 섬겨야 할 그들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는 건 최고의 칭찬이라고 새겨듣는다.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계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나는 다만 그분들과 함께 겪으며 같은 곳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자리잡고 있어서 일거다. 그런데 왠일인지 노숙인 아저씨들을 대하다보면 자꾸 가르치려하고 잘못된 습성을 바로잡으려하는 나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모양으로 만나는 아저씨들과는 가까워지지도 않고 오히려 관계가 서먹해지고 함께 지내기가 서로 불편해진다.
노숙인 아저씨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하던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모두 멀리한 채 시린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다. 그러나 닫혀버린 그분들의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그래도 벧엘의집만이라도 그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길 소망하고 묵묵히 그들의 곁에 있기를 꿈꾼다. 벧엘의집이 사명을 열심히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열매가 착실히 맺혀지고 아저씨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필 것이라는 믿음을 품어보는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