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피요르드만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장관중의 장관. 선사시대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깎아내린 절벽은 파도와 어울어지면서 한폭의 풍경화를 연출 시키고 있는 곳.
때문인지 전세계에서 1년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국민수도 상당수에 있는게 현실.
이야기의 주제는 신이내린 천혜의 관광자원속에서 특히 시골길만을 운행하는 관광버스운전사에 얽힌 눈물겨운 이야기.
이 버스운전사는 10년 무사고의 베테랑에 다가 외양도 순박한 인상이어서 전용 시골 버스운전사로는 안성맞춤격이었다. 이 운전사가 모는 버스가 지나가는 시간대의 버스는 항상 관광객들로 초만원을 이루기 마련. 어느날 역시 이 시골버스가 관광객을 가득 태우고 피요르드만을 감상하면서 좁디좁은 협곡길을 지나고 있었다. 신나게 주변경관에 대해 설명하면서 차를 몰고가는 이 운전사의 눈에 어렴풋이 무엇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야생동물이려니 생각했던 그 물체를 확인한 결과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알수 없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어놓을 수 있을 정도의 어린아기가 버스를 향해 두팔을 벌리고 달려오고 있는게 아닌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운전사. 급제동을 걸었으나 유독 그날 따라 제동장치에 이상이 생겼는지 그대로 미끄러지 듯 달려가고 있었고 이제 어린이를 피해 천길 낭떨어지 바닷속으로 굴러 떨어지거나 아니면 그대로 어린이를 치고 산속으로 돌진, 벽에 부딪혀 의지하면서 세우든지 양자택일밖에 달리 방법이 없게 됐다.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라 눈을 꼭 감고 있던 승객들. 버스가 한동안 요동을 치더니 커다란 충격과 함께 비스듬히 기운채 버스가 정지하고서야 자신들이 살았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잠시, 운전사가 보이지 않자 두리번거리며 찾는 승객들의 눈엔 저만치 길 한가운데 피투성이가된 어린이를 끌어안고 있는 운전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 할머니가 운전사 곁으로 다가서서 어린이와 운전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갑자기 운전사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울부짖기를 “당신은 살인자야! 차라리 나이든 우리가 죽고 저 어린생명은 살렸어야지. 무슨죄가 있다고 채 피지도 못한 어린생명을 죽일 수 있단 말이냐” 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잠잠했더 나머지 승객들도 따라서 웅성거리며 사고버스의 운전사에게 어린이를 죽일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느냐며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한창 소란스러운 현장에 사고버스의 뒷처리를 마무리하고 나타난 버스안내원의 절규에 소란은 즉시 가라앉았다.
“여러분! 여기 숨져있는 이 꼬마는 바로 이분 운전사의 막내아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러시면 저 운전사는 어쩌란 말인가요.”
뒤늦게 알려진 일이지만 이 막내는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근처를 지나간다는 소식에 아버지를 만나러 나왔다가 이지경이 되었고 운전사는 자신의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위험의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고 순간에 임박해서 자신의 막내 아들임을 확인하고서도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아들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내던져 버린 운전사의 숭고한 책임의식이라는 점이다. 책임감이야말로 바로 공(公)과 사(私)를 구분할줄 아는 기본이며 우리가 반드시 지켜나가야할 도덕률이 아닌가.
지금 이 시대를 한번 뒤돌아 보자. 과연 자신이 한일에 대해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 몇%나 될까? 물어보는 것이 차라리 창피할 정도로 책임의식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정도다. 하기야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먼저 지켜주어야만 그나마 명분이 설터인데 지도층에 거는 기대가 거의 제로 상태인 것을 감안한다면 책임이라는 낱말조차 거론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은 필자만이 갖고 있는 피해의식일까?
이런 시점에서 노르웨이의 시골버스기사가 보여준 公과 私를 구분하는 책임의식이야 말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커다란 교훈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명암이 대비되는 公`私의 구분력. 반드시 되살려야 할 우리시대의 최대명제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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