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날리는 영상과 소리 어울림 압권
삶.죽음 쓰다듬는 따뜻한 ‘거장의 손길’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별채에 한 노인이 누워있다. 노인이 아끼는 소실 송화가 그 옆에서 나지막이 노래한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속이요 이것저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는 꿈, 꿈은 꾸어서 무얼 할거나.” 송화의 소리를 들으며 노인은 까무룩히 영면에 든다. 매화꽃잎이 눈송이처럼 쏟아져 흩날린다.
‘천년학`은 눈 시리게 아름다운 이 한 장면으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장한데 화면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토록 아름다운 죽음이라니. ‘천년학`은 아름다워 슬프다.
노인은 친일로 치부해 해방 후에도 누리며 산다. 송화는 4·3 항쟁의 제주에 핏줄이 닿아 있다. 어찌 보면 노인은 역사의 가해자이고 송화는 피해자일 수 있다. 그럼에도 노인은 송화의 소리에 취해 행복한 임종을 맞는다. 마음이 슬며시 불편해 지려는 순간, 송화의 소리와 노인의 표정이 가슴을 친다. “아, 삶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인간의 삶이 그리 명료하더냐, 그렇게 살더냐고 묻는다.
무심하다. 노인과 송화의 대비가 그렇고 애절한 사연이 굽이굽이 이어지는데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게 그렇다. 누구를 탓하거나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 시대 그 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무심한 시선은 그러나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무심함으로 세심한 시선은 서글픈 운명의 뿌리까지 끄집어내 품에 안는다.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는다.
그리하여 조금씩 비워나간다. 남매이기에 살을 붙이고 살 수 없는데도 송화를 찾아 천릿길을 떠도는 동호나 닿을 듯 또 멀어지는 송화나 속을 비워가는 유랑자들이다. 거장 감독은 점점 비워가는 허허로운 가슴을 보여준다. 마지막엔 불현듯 학(鶴)-전설마저 날려버림으로써 영화까지 텅 비운다.
‘천년학`은 송화와 동호의 사랑이야기다. 간절히 이루고 싶었으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야기. 무심함과 비움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넘어 사랑이 이룰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전부를 녹여낸다.
‘천년학`은 예술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 남은 한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로도, 사연 많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로도, 기구하게 얽힌 한국의 근대사로도 읽힌다. 다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지고 또 다시 보면 생각이 또 달라진다. 그래서 걸작이다. 어떻게 읽을 것이냐는 관객들이 선택할 몫. 다만 한 가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라는 데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 12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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