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떠도는 말, 바뀌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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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떠도는 말, 바뀌는 말

  • 승인 2007-04-03 00:00
  • 신문게재 2007-04-04 21면
  • 이규식 한남대 유럽어문학부 교수이규식 한남대 유럽어문학부 교수
시대에 따라 말의 뜻은 변하게 마련이라지만 요즘처럼 신속하게, 그것도 본래의 의미와 멀고 가까운 거리를 두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말이 시대상을 반영하는 척도일뿐더러 흡사 살아있는 물체와 같아서 항상 새롭게 바뀔 준비를 하고 있다 해도 그 변화가 사회 구성원 간의 이질감을 조성하고 세대단절, 격차조성에 영향을 준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공산품을 만드는 제조업체를 가리켜 ‘공업사’라는 명칭을 쓰는데 어느 사이 자동차 정비업소의 대명사로 전용되었다. ‘기사’는 엔지니어를 포함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 호칭이지만 특히 운전을 직업으로 하는 분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언어의 뜻이 대체로 축소, 국지화 되어가는 과정이 과거 우리사회 언어의 의미변용 양상의 주축을 이루었다면 요즈음에는 본래의 뜻을 훌쩍 벗어나 새로운 해석을 추가하거나 과장, 호들갑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불확실성의 세기, 가치관의 전도시대답게 말의 뜻도 고삐 풀린 말처럼 어디로 갈지 예측이 힘든 형편이다.

예전에 ‘엽기’라는 표현은 왠지 으스스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희대의 살인사건이라든가 보기 드문 괴기함을 표현했던 만큼 의미의 희귀성만큼이나 좀처럼 쓰이지 않는 용어에 속했고 ‘엽기괴담’같은 수준만 되어도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다. ‘獵奇’라는 어려운 글자풀이 그대로 기이한 것을 뒤쫓는다는 뜻은 이제 의미가 대폭 완화되어 자신이 금 그어 놓은 범주나 인식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할 경우 ‘엽기’로 명명된다.

얼마 전 캐릭터 산업의 불씨를 당긴 ‘엽기토끼’ 마시마로의 사례가 엽기라는 말의 의미전환을 촉진하지 않았나 싶다. 엽기토끼 마시마로는 사실 우리가 아는 의미로 ‘엽기적’인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귀여운 구석이 적지 않다. 성질이 좀 괴팍하고 동료들과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못한가하면 제 성질대로 생뚱맞은 행동을 하는 토끼는 어느 사이 엽기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태’라는 표현도 그렇다. 대체로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나 성도착 증세를 지칭하던 본래의 뜻이 자기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련의 언행을 포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상식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희귀한 성적 욕망의 표출이나 관음증, 새도-마조히즘(SM)취향 등에서 이제는 아버지가 사랑스러운 딸에게 가벼운 스킨십을 해도 딸은 거리낌 없이 “아빠, 변태야”를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변태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한 탓만도 아닐 것이다. 날이 갈수록 관능과 감각을 자극하는 수위는 높아지는 반면 반응에는 둔감해진 결과 사람들의 충격흡수력, 감각마비는 커지고 ‘변태’의 기준은 점차 완화되어 하향하는 이율배반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최근 널리 회자되는 ‘굴욕’이라는 유행어는 이러한 의미변전의 최신 버전으로 실로 다양한 사회적, 심리학적, 언어학적, 정신의학적 분석까지 가능하게 한다. 주로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난감한 상황을 설정하고 민망해하는 모습을 담아 ‘○○○의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시리즈물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학교 다닐 때 역사시간을 통하여 ‘굴욕적인 ○○○사건’이나 ‘한일굴욕외교 결사반대’ 같은 1960년대 시사용어에서 봤음직한 기억이 이제 그 의미를 넓혀 조금이라도 떨떠름한 입장에 처하거나 연예인의 경우 종전의 반듯한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설정하여 이내 아무개의 굴욕으로 명명한다.

장동건, 강성연, 손예진씨 같은 준수한 외모의 연예인 모습을 패러디하여 희화화시키고 작위적인 상황을 연출한 뒤 이른바 굴욕시리즈를 즐기는 심리저변에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 예술가들이 모나리자 얼굴에 수염을 붙여 놓고 킬킬거리던 사례와 유사점이 있다.

다다이즘의 경우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허망함을 일깨우며 일체의 기존 가치체제와 질서에 대한 도발과 부정, 전복을 꾀하려한 시도였다지만 요즈음의 ‘굴욕’ 모드는 과연 어떤 새로운 사조와 철학을 준비하고 있는지. 엽기, 변태, 굴욕 같은 용어의 의미변화가 필경 소용돌이치는 새로운 감성의 격랑, 낯선 감정체계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찻잔 속의 태풍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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