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에는 노후 문제라는 것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자녀수는 많고 평균 수명은 짧았기 때문이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성 한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는 여섯 명이었는데 비해, 평균 수명은 50세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수십 명의 손주들에 둘러싸여 성대한 회갑잔치를 치르는 것이 가문의 경사였다. 이렇듯 부모님이 오래 사시지도 않고, 형제·자매가 여럿이 되는 상황이니 개인의 부양 부담도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 전체적으로도 노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 역시 시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20년 동안 한국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고령 비율)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아직 한국의 노령인구는 세계적으로 볼 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심각한 문제는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로 넘어가는데 걸리는 시간의 속도이다. 프랑스는 115년, 미국은 70년이 걸렸다. 지금까지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의 경우에는 24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통계자료에 따르면 18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사상 유례 없는 초고속 고령화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충격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여러 관점에서 이를 살펴 볼 수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노인 개인의 입장에서 겪게 될 문제들만 살펴보자.
노인들이 겪는 문제 가운데 역할의 상실과 가난, 두 가지 측면에서만 생각해 보자. 먼저 역할의 상실. 현재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나는데 정년은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이다. 아니, 실제로는 정년이 더 단축되는 추세이다. 결국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보내는 여생이 그만큼 길어지게 되는 셈이다. 산업화, 자동화,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노인들의 역할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고, 사람들은 더 빨리 노인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간 자신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인정받았던 능력과 삶의 보람, 자신의 존재감, 정체성 등이 퇴직과 함께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역할의 상실은 가난 즉 경제적인 문제와도 직결된다. 한국에서는 그나마 모아둔 돈이나 퇴직금마저도 자녀의 결혼 비용으로 써 버리기 일쑤이다. 그야말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마는 셈이다. 그렇게 하고도 자신들의 노후를 위한 경제적인 여유가 남아있거나 자식의 부양을 받을 수 있다면 모를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노후를 위해 따로 자금을 마련하는 사람들보다는, 아무 준비 없이 노후를 맞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하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행복한 노후를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생계가 막막한 채로 노년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70이란 나이가 나한테 만큼은 결코 다가오지 않을 먼 훗날의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70이 되었을 때 내 주변 세대들이 대부분 살아있다고 한번 상상해보자.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사회의 노인 비율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때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가령 지하철에 경로석이 따로 있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나와 시대를 같이한 정겨운 형제·자매, 친구들이 나의 바람처럼 다들 행복하게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 때를 대비해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또 국가는 ‘우리의 일흔’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우리의 일흔’은 국가만의 고민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일흔’ 전에 당장 나의 일흔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출가 전 늙어가는 노인을 보며 한탄했듯 지금 내 안에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는 것이다. ‘내 일’로서 관심을 갖고, 다 같이 사회의 고령화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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