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제조·보관에 획기적 전기
20년간 전염병에 황폐화되기도
1.백년전쟁: 1152년 당시 프랑스의 한 공국(公國)이었던 아끼뗀느 공주인 알리에노르가 국왕 루이 7세(1137~1180)와 이혼하고 앙주 지방의 백작이었던 앙리 쁠랑따주네와 재혼했다. 바로 이 앙주 공작이 이후에 영국 왕 헨리 2세(1154~1189)가 되고 새로이 쁠랑따주네 왕조를 열게 되었으며 왕비가 지참금으로 바쳤던 보르도와 서남부 일대의 영토는 영국의 땅이 된다.
보르도와 서남부 지방의 와인은 곧 바로 영국의 식탁에 올랐고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마저 주장하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1337~1453)이 일어났다.
이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의 이익을 위해 끝까지 싸웠던 딸보(John Talbot) 장군이 1453년 까스띠옹(Castillon)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영국의 보르도지방 소유는 끝을 보게 되었고 또한 백년 전쟁도 끝나게 되었다. 이 후의 역사 속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평탄치 못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집권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영국은 이에 맞서 보르도 와인을 금수조치하기에 이르렀고 보르도의 대체 시장을 찾아 나섰다. 바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훌륭한 대체 시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와인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에 가야 영국과 프랑스는 관계 개선을 한다.
2. 유리병 개발: 17세기 유리병의 개발로 와인산업이 발전하면서 유명 와인에 라벨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679년에는 동 페리뇽수사가 샴페인과 코르크 마개를 개발하여 와인의 제조와 보관에 있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3.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혁명 이전의 영주나 수도원 소유였던 와인 산업의 시스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은 구체제와 신분제 등 왕정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탄생을 가져온 시민혁명이었다. 파리의 시민과 부르고뉴 등지의 농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파리의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지방의 농민들은 영주의 성과 교회나 수도원들을 불태웠다. 혁명 정부는 봉기한 농민들에게 당시 교회와 영주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물론 포도밭도 몰수하여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부르고뉴의 포도밭들은 영세한 규모로 여러 소유주들에게 나뉘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보르도 지역은 곧바로 신흥 금융자본에 의해 포도경작지가 대규모로 재통합되면서 넓은 경작지로 남게 된 것이다.
4. 큰 재앙: 1800년대부터 약 20년간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전염병이 침투하여 포도원이 황폐화 되었다.
필록세라는 딱정벌레 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포도나무의 뿌리와 잎에 기생하여 혹을 만들어 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무서운 해충이다. 이후 유럽 전역에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등 신세계 여러 나라로 이 포도 나무의 전염병이 번져 나갔다.
이 필록세라를 옮긴 것은 접목을 위해 들여왔던 미국의 포도나무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전염병으로부터 포도나무를 구해준 것도 미국의 포도나무였다.
지금도 미국에서 들여온 수백만 그루의 토종 뿌리에 유럽의 포도나무 몸통을 접붙여 식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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