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사대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즉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식사 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 또한 바로 행복이 물질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행복 수준을 어떻게 파악해 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산수시간에 ‘분수`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행복지수`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각자 살면서 ‘바라는 것`과 ‘성취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행복지수는 바로 이 ‘바라는 것`을 분모에 놓고, ‘성취한 것`을 분자로 삼을 때 나오는 분수가 된다. 예를 들어, 바라는 것이 100,성취한 것이 80이라면 행복지수는 80이 된다. 이 행복지수를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수준인 100으로 만들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분자의 ‘성취한 것`을 키우거나, 분모 쪽의 ‘바라는 것`을 줄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의 증진을 위해 ‘성취`를 키우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분모를 낮추는 일, 즉 ‘바라는 것`을 관리하는 것 또한 주어진 여건 속에 자신의 행복을 키우기 좋은 방법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제 특별한 행복지수를 가진 어떤 사람을 생각해 보자. 즉, ‘바라는 것`보다 ‘성취한 것`이 더 많아 행복지수가 100이 넘게 나오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본인은 100을 바랬는데 120이란 결과를 성취한 경우 행복지수는 얼마가 될까? 산수에 밝으신 분들은 금방 120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120이란 행복지수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 행복지수 100이란 이미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수준을 뜻하므로, 그보다 큰 지수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의 행복지수를 우리는 숫자가 아닌, 말로써 ‘감사`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20이 어떻게 얻어진 것이든, 얻어진 자체도 ‘감사`이겠지만, 정작 이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없이는 여분의 행복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은 의외로 가까이 있어 보인다. 행복지수의 ‘성취한 것`과 ‘바라는 것`을 잘 관리할 수 있고, 여기에 ‘감사의 마음`을 더 할 수만 있다면, 이게 곧 참 행복을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컵에 물이 반 들어 있을 때 ‘반이나(!)` 남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반이나` 남았다고 보는 사람의 행복지수가 더 높을 것이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성취한 것`에 대한 ‘마음의 감사`가 분모를 작게 함으로써 전체 행복지수를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이 왜 인생의 행복을 크게 만들어주는 지를 잘 말해 준다.
100을 바랬는데 120을 가진 분은 그 20을 타인에게 나누어 줘도 여전히 행복지수는 100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분이다.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20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행복`과 ‘감사`가 함께 커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필자가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정의를 덧붙여 보고자 한다.
‘성공한 삶`이란, 내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 자리가 좀 더 빛나고, 또 나로 인해 내 주위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지위가 높건 낮건 나는 성공한 삶을 산다고 믿는다. 대전역 앞을 맡은 환경미화원을 예로 들어보자. 그 분은 자기가 맡은 구역을 누구 못지않게 깨끗이 청소한다. 그 덕에 매일 그곳을 지나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게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 분의 삶이야말로 성공한 삶이 아니겠는가?
중도일보의 독자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든 간에 그 자리가 자신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주위 분들이 더 행복해지는 그런 의미의 성공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해 본다.(와세다대학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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