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철 작가 |
사랑방 툇마루 후보들의 얼굴에 마을 악동들이 대꼬챙이나 송곳 자국을 죽죽 내는 바람에 소년의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소년은 당연히 지지 후보가 없었다. 1번 이세진 후보는 막둥이 동생처럼 이마가 넓었고 4번 서민호 후보는 개울 건너 광식이처럼 이마가 좁아서 두 인물을 대비시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이 ‘누가 될 것 같으냐` 하시길레, 공무원 자식이었던 나는 박정희라고 대답했고 농사꾼 아들인 내 친구는 윤보선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아카시아와 삘기꽃을 아귀통 시리게 씹어대던 보릿고개였다.
원효로 자취생 중학교 시절,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붙었다.
3선 개헌을 통과시켜 다시 출마한 박정희 후보는 ‘혼란 없는 안정 속에 중단 없는 전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는 사진을 담벼락마다 도배했다. 젊은 김대중 후보는 40대 기수론의 열띤 웅변으로 구름 같은 인파를 모으기도 했다. 박정희 이외의 대통령을 경험한 바 없으므로 당연히 당선되리라 예상했고 그대로 들어맞았다. 랭킹 3위는 진복기씨였다. 그는 카이저 수염 한 짝에 5만5천표씩 얻어 11만표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고교시절의 대통령 선거에 대한 기억은 허망함과 무심함의 점철이다.
대통령은 박정희 이외에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체육관에서 독자 출마한 박후보가 기권 두 표를 제외한 99.9%로 당선되었지만 선생님들은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스크럼 짜던 고려대학생들이 탱크를 피해 우르르 도망갔고 평화시장 전태일과 서울농대 김상진이 목숨을 끊어도 모두 침묵만 지켰다.
세상은 칼바람으로 싸늘했고 연이어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수배전단 속의 서울대학생들은 165센티 안팎의 작달막한 사내들이었고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징역 3년에 처한다`고 해서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몇 차례의 긴급조치 선포와 함께 12월초에 갑자기 방학을 앞당겨서 여드름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세월이 물살처럼 흘러도 여전히 대통령은 한 사람으로만 각인되던 시절이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나 ‘왜 불러`도 금지곡이 되었고 김정호나 어니언스의 노래가 사춘기의 가슴을 우울히 적셔주었다. 빨랫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얼핏얼핏 보이기도 했지만 시국은 여전히 잿빛의 연속이었다. 홍수환의 4전5기와 차범근의 센터링이 이따금 막힌 가슴을 뚫어주었다. 그 70년대 후반 나는 입영열차를 타고 깊은 터널 속으로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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