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간 지배에 대해 일본은 ‘조선의 개화’ 운운하며 ‘독도영유권’ 주장, ‘역사교과서 왜곡’, ‘군위안부’를 실체 없는 ‘자진매춘(賣春)’이라 변명을 일삼는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의 태도도 다를 게 없다.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하에 백두산을 ‘장백산’ 운운하며 그들 영토라 내세운다. 저 찬란했던 고구려와 부여도 중국의 변방속국이라며 역사왜곡에 열을 올린다.
그러함에도 북한은 입을 다물고 있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공부를 강화, 정사(正史)를 연구개발, 대처해야할 시점이다. 매판사관(買辦史觀)의 절개, 친일파 정리, 애국선열 승모사업, 민족정기의 선양 등으로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한다. 특히 역사에서는 대충(Abut)이라는 개념 따위는 통하질 않는다.
요즘 친일파 수괴들의 소유 토지 환수를 서둘고 있어 뜻있는 이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하지만 말단교사, 면서기, 척식회사 사원 급 친일행위 같은 건 불문에 부쳐야 한다는 게 국민적인 여론이다. 국가 민족의 보위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말단 부역자를 거론한다는 건 정서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 이승만은 친일파를 대거 기용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사실은에 우리는 가슴을 친다. 이제는 민족대표 33인의 행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33인 중 정작 앞장 선 것은 29명이었고 그 중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이 빠진데다 파고다공원에서 손병희가 선언문을 낭독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는 게 아닌가.
이들 29명은 인사동 태화관(중국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들면서 총독부에 연락, 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축배를 들면서 의연하게 자진체포(연행)당했다고 한다. 그것은 비폭력시위였다. 당초에는 도쿄유학생의 선언문처럼 혈전(血戰)을 불사한다고 초(草)했다가 부드럽게 고쳤다는 것이다.
최남선은 “나는 앞으로 학자의 길을 갈 생각이므로…”라며 우물쭈물하더니 끝내 친일 길에 빠졌고 최린(崔麟)과 박희도(朴熙道), 정춘수(鄭春洙) 역시 그 길을 걸었다.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것은 청년 정재용이었다. 이제는 이와 같은 내용도 바르게 알리고 또 정확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한겴?관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첫째는 국민들의 역사인식(공부)과 민족의 자존, 국력의 응집으로 맞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본도 약점은 있고 소수이긴 하나 ‘양심세력’은 존재한다. 그간 80여 차례 취재와 자매결연, 세미나, 문화탐사를 통해서 필자는 많은 지성들을 만나봤다.
애국시인 윤동주의 시(詩) 세계를 예리하게 파헤친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그 시를 일어로 번역 출판한 ‘이부키고오’ 교수, 윤동주의 고향 연변(중국)에 발자취를 알린 ‘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교수 등이 그 예다. ‘西日本신문’의 ‘이테준사쿠’ 부장은 종전기념 특집으로 윤동주의 일생을 빼앗긴 시혼(奪われた詩魂)이라는 주제로 다룬 바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고 외마디소리를 지른 끝에 죽었다며 ‘생체실험’의혹을 제기하는 등…. (그 연재물을 필자에게 보내와 보관 중) 또 있다. 윤봉길의사 외아들 ‘윤종’을 경찰서장과 싸우며 ‘서산농림’에 입학시킨 교장 ‘다케다마토우’ 시인도 자주 만났다.
“어쩌면 나는 백제계 혈통인지 모른다”는 전 ‘호소카와’ 총리 등 많은 지성들이 있다. 한.일 양국의 역사복원은 이들 양심세력과의 접촉으로부터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게 3 ` 1절을 맞는 소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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