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홍 시인 |
어떤 것이 졸렬한 비겁인가? 개인의 치부가 사회로 파급돼 수치스러운 일과 조직 이름으로 지은 일이 대중에게 파급되면 크게 명예가 손상되는 일이니 함부로 드러내지 않음이 바른 행동일 될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로 특수한 상황은 나라나 조직이나 작게는 가정에서까지 허물을 드러낸다 것이다. 즉, 기탄없이 토해지는 자기로부터의 내어놓음이다. 대중에 대한 진실을 드러냄으로 겉은 비방인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국가나 단체 혹은 가정에서의 무한한 이익을 위함이니 두려워 할일이 아니다.
얼마 전에 TV는 물론 각 신문이나 언론을 통해 미술계를 주도하는 한 단체의 선거는 물론 후보자 간의 비방 치부의 모습을 낱낱이 비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꼭 미술계를 꼬집어 얘기한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 예술계에 속한 모든 단체에 팽배한 문화의 전반적인 상황인식 자체가 속한 이들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적인 부정적인 작금의 상황 인식의 진단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세계는 문화지수가 복지 지수와 맞물려 사회 전반적인 행복지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고 문화 콘텐츠 자체가 나라의 기간산업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과 일반인들의 문화연대 또한 진일보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책이나 교육을 통해 다양한 장애의 양상들을 음악이나 미술을 통한 치료학까지 활발하게 학자들 간에도 논의되는 시점에서 예술은 그동안의 증명되지 않은 가치의 재정립과 도약기를 맞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어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물며 문화적인 연대성이나 유대관계의 지속성이 약한 장애인 작가들도 그러한 모습일진대 과연 작금의 대다수의 예술 단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봉사하는 자리가 바로 협회의 기구가 아닌가? 이제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들은 다른 말은 없겠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훼방이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비판하는 것도 인연이 되어서 필경에는 돌아오기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미워하거나 협의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허물이 되지 않겠는가?
시작은 서설( 瑞雪)과도 같다. 그 위에 화해와 화평이 깃들어 멋진 한국미술협회의 새 출발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든지 열악한 문화의 이면에는 반드시 절망스런 현실이 존재한다.
시대가 복지와 평등을 부르짖고 문화가 행복지수가 가치척도가 되어 진 사회에 문화의 향수에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을 찾아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교육프로그램을 개발, 관(官)과 협심하여 작은 불씨를 지피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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