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성빈 충남여고 교사 |
그로 인하여 동춘당 고택 정문 왼쪽과 사당 쪽 출입문 밖에 있던 행랑채가 허물어졌으나 수리하지 못해 끝내는 없어졌다. 또 하나는 정문 오른쪽 동춘당 쪽으로 두 칸 짜리 청지기 방이 있었는데 이 또한 퇴락한 채 손보지 못해 아쉽지만 자취를 감춘 건물이다.
그나마 고택과 사당, 동춘당은 겨우 퇴락을 면한 채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61년 초 정부에서 보물 209호로 지정 발표한 이후 대전시 보조로 보수하게 되었는데 오랜 비바람에 깨지고 허물어진 기와와 동춘당 서편 벽을 전면 보수한 사실이 있다.
동국대 교수가 운운한 대목은 당시 문화재위원의 고증에 의하여 동춘당 서편의 온돌방 내외벽과 천정의 황토 흙벽을 복원한 사실을 일컫는 말 같다. 그 이후에도 고택과 동춘당은 몇 차례의 보수의 손길이 거친 일은 있으나 이전된 일은 없다.
둘째, ‘건물 기단석은 왜 막돌을 사용하였는가 하는 점도 역시 의문점이다.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사대부가에서 당(堂)을 그렇게 세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제기한 막돌 사용에 대한 의문 제기 부분이다. 필자는 건물의 규모나 형식이 내로라하는 사대부가에서는 같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똑같을 수 없듯이, 건물도 그 주인의 성품 지역 취향 등을 반영하고 있다.
동춘당 건물의 특징은 동춘 선생이 서민과 가까이 하려는 의지를 알 수 있다. 건물의 기초인 기단은 같은 시기의 다른 건물 기단과 달리 잡석을 이용하여 한 줄로 낮게 쌓았는데 우리나라 건물에서 대개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가 기단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소박하고 검소한 선생의 성품을 알 수 있다.
또한 굴뚝은 벽 옆에 초석과 같은 높이로 굴뚝의 구멍만 내어 거의 표시가 나지 않게 처리한 점과 방주 기둥을 사용한 점 역시 집주인의 의지를 잘 알 수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거의 같은 시기에 영남의 사대부가 건물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회마을 양진당과 충효당의 경우 동춘당과 달리 두리기둥과 7단의 높은 기단으로 처리한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으로 생각한다.
셋째, 동춘당 현판의 문제인데, 이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못에 걸었던 부분이 썩고 조각이 날 지경에 이르러 더는 현장에 걸어 둘 수가 없어 별도 보관키로 하고 복제품을 현장에 걸어둔 것이다. 이것이 마치 은밀한 비밀인 양 의혹을 부채질하듯 함은 연구자의 양심의 문제이며, 현판은 모조품 가짜라는 표현을 썼는데 단어를 쓸 때 복제품 혹은 모사품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복제품을 쓰는 경우는 박물관 등 허다하게 많다. 예를 들면 추사 고택에서도 중요 문화재인 현판을 따로 보존하고 있는 사례가 있다. 모조품 가짜라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동춘당을 사랑하는 목적에서 썼지만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에 격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한다.
넷째, ‘벽을 만들 때 갈대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수수대도 사용하고 있고, 갈대도 사용하고 있다. 본 글에서의 쟁점은 흰 벽이라는 사실을 반론하고자 한 것이다.
흰 벽이어야 된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L씨가 표현한 독일의 한 대학총장 일행이 벽의 색깔이 흰색이라고 한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동춘당의 외벽이 흰색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과연 그 독일인들이 한국 건축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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