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竟渡河 (공경도하)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墮河而死 (타하이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당내공하) 가신 임을 어이할거나
한바탕의 봄꿈 같아야 부르는 이별가가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일전에도 그랬다. 여당 전당대회 축하공연에서 신효범이 열창한 노래가 심상히 들리지 않는다. ‘멀리 떠난 내 님아 언제나 돌아오려나/ 나의 사랑 내 님아 언제나 돌아오려나/… 한번 떠난 내 님은 또 다시 돌아오지 않네∼’ 이 소절에서 이 땅의 문학사 최초로 ‘임’이 된 사나이, 백수광부를 떠올리게 된다.
임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임을 장차 어이할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노래했지만 실패한 무당의 권능이거나, 신화적으로 해석해서 여성의 성(생활)을 나타낸 노래라 봐도 무방하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정치에도 대입시킬 수 있겠다.
자, 루비콘강을 건너버린 여당의 이른바 통합신당파와 당 사수파 사이, 후보 검증으로 도덕성을 까보자는 야당 두 진영 발아래에도 술 취한 백수광부가 건너던 시퍼런 이별의 물결이 넘실댄다. 결국 갈라선다 안 갈라선다, 여론조사 비용이 아깝다. 만남과 헤어짐의 드라마가 곧 정치이며 권력 앞에서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게 정치의 생리 아니던가.
연애론적 주석을 달면 정치는 남녀간처럼 아름다운 오해일 수 있다. 연애의 필수 요소가 바로 콩깍지다. 오해란 강제적인 축약인바 생략할 건 생략하고 웬만한 밉상은 예쁘게 봐주는 것이다. 연애가 오해라면 사랑은 이해, 결혼은 비참한 이해다.
참 이해와 오해, 참 합의와 거짓 합의를 공유하는 정치과정에는 아름다운 오해와 말없는 사기의 속성이 들어간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빈틈없는 강물이 있다. 목숨을 내주고 겨우 엿보는 물빛도 있다.
위기의 강을 건널 땐 머뭇거리지 말라지만, 강 나름이다. 죽음의 요단강인지 영광의 루비콘강인지 따져보는 것도 해롭지 않다. 해는 지고 강물은 자꾸자꾸 불어나는데 뮤즈 여옥이 바친 슬픈 발라드를 수천 년을 건너 되돌려 들으려는가. 님아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님아 님아 내 님아 나를 두고 가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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