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지금 살아난다면 어떨까? 자살자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의 1.5배라는 말에 거리마다 번쩍이는 자살 경고 신호등을 달고 대한민국 골목골목의 주차금지 팻말은 자살금지로 갈아치우자고 제안할지 모른다. 또 지난 10년 동안 연기군이나 부여군 인구에 맞먹는 8만 400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베르테르에게 가혹한 혐의가 씌워지는 현실에 질려 자신의 책을 회수해 불사르고 베르테르를 구덩이에 처넣으려 할지 모르겠다.
아닌게아니라 자살을 사회·제도적으로 예방하고 치유해야 할 질병이라 보면 얼마든지 전염성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 상품화된 인간의 문제가 어필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 자신의 죽음은 더 자극적이다. 그러나 전염성의 영역만은 아니다. 모든 형태의 죽음엔 사회구조나 분위기가 깔려 있고 그 양상도 총체적이고 다층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도 베르테르에게나 올가미를 씌우니 닭이냐 달걀이냐의 순환론에 빠지는 것이다. 그는 물론 죄를 저질렀다. 남의 여자를 사랑한 죄와 자살한 죄, 따라 죽게 한 죄. 운명의 여인 로테를 사모하다 고뇌 끝에 죽음을 선택했다. 반향은 엄청났다. 동조자살, 모방자살이 늘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는 금서 딱지가 나붙었다. 와중에도 여자들은 여주인공 로테처럼 사랑받기 원했다.
이쯤에서 베르테르를 변명해야겠다. 쇼펜하우어가 좋아했고 나폴레옹이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며 괴테에게 우쭐했다는 이유로, 독일 병사들의 얼어붙은 마음이 젊은 베르테르로 하여 훈훈해졌다는 전설 같은 이유를 들어…. 이 책이 내 젊은 날의 정신적 구원이었던 이유 또한 현상적이 아닌 인간적 차원의 생을 꿈꾸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격으로 거듭 변명한다. 옥상과 다리에 펜스를 치기에 앞서 너무 쉽게 상실감에 빠지는 우리 사회의 성긴 그물부터 깁는 게 순서다. 농약 농도를 묽게 하는 일은 하책(下策)이다. 사람 죽고 사는 것이 어찌 독약과 울타리 잘못인가. 또, 꼭, 왜 슬픔뿐인가. 알랭 드 보통의 책이름을 낚시질해서, `베르테르의 기쁨`도 함께 깨닫게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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