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강독을 하는 동안 연암이 중국인들과 어우러져 필담을 나누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이미 조선을 떠날 때부터 어디에 가면 누구를 만나볼 것이라는 여행 스케줄을 단단히 준비한 터였으므로 연암은 가는 곳마다 중국 사람들을 만났고 부지런히 그들 속으로 파고들어 이른바 북학의 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자를 동원한 필담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사람들의 일이라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교수님의 그 같은 소망은 어렵지 않게 실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교수님은 그 참에 당신이 태어난 곳도 들러보고 싶으셨겠지만 안타깝게도 간절한 소망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다. 중국에 가볼 기회는 많아졌어도 교수님을 모시고 여행을 해보겠다는 나의 소망도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한글이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훌륭한 문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절 단위로 모아쓰기의 방식을 취하는 한글은 표음뿐만 아니라 일정 정도 표의의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자에 관한 한 우리는 축복받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한자라는 또 하나의 문자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를 중국문자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런 식으로 한정하여 규정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과거 한자 혹은 한문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써 온 공동문어문자이다. 공동문어문자는 한자말고도 라틴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등이 있는데, 이러한 문자들의 경우 굳이 국적을 분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우리가 한자를 외국어로 보고 도외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중고교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을 배제한 야만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지금의 어느 연령층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수업시간에 한자만 나오면 저절로 목이 움츠러드는 학생들이 속출하던 시절이 있었다. 현재는 한자 과목도 있고 수준도 제법 되는 것 같아서 다행스러운 일이나 대학에서 체감하는 학생들의 한자 능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한 편이다. 한자로 필담을 나눌 정도의 수준은 기대하기 어렵다.
얼마 전 동남아시아 보루네오 섬 북단에 있는 코타키나바루를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거기서도 한자로 적힌 간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경험으로 말레이어와 함께 영어가 통용되고 있었지만 30%에 달하는 중국계 사람들로 인하여 한자도 문자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관계로 한자의 비중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여느 때 중국 여행에서처럼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에서는 필담을 나눠볼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내 되새김질을 한 것은 한자가 또 하나의 모국어라는 점, 그리고 그 모국어를 매개로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점 등이었다. 생각해보라. 연암이 도포자락 휘날리며 대륙을 누빌 수 있었던 것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바로 그 모국어 덕분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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