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감상만큼은 단순하지 않다. 먼저 물컵과 우산이라는 두 오브제에 담긴 대응관계를 찾아 나서야 한다. 구구한 해석이 재미를 떨어뜨리고 제목마저 감상을 가로막는 수가 종종 있지만 불가불 얘기할 수밖에 없다. 마그리트의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누구보다 감상자의 시각을 중시했으면서 특별히 덧붙인 화가의 설명부터 듣기로 한다.
"컵 위에 줄을 그어 물건을 여러 개 드로잉했습니다. 100번째 혹은 105번째 드로잉 후에 이 선이 확장되면서 우산 형태가 됐지요. 우산은 컵 안에 담겼다가 결국 컵 아래로 가게 됐습니다. 나는 헤겔이 대비되는 두 오브제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을 걸로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 기능이란 어떠한 물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물을 인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상자에 따라 이런 스토리도 가능하겠다. 고금동서의 모든 걸 쏟아 학문에 일가를 이룬 헤겔이 자기만의 성안인 우산에서 성밖 바다를 보며 유유자적 휴가를 즐긴다. 즐기다 목이 마르다. 물 마시려면 우산을 접어야 한다. 일생을 건 철학적 완성을 물 한 잔에 바치느냐 목마름을 참느냐,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처럼 우산이 접힐까 걱정이 앞서겠지만 설 연휴만큼은 목마르면 냉큼 컵을 내려 물을 마시길 권한다. 휴식을 위해 일한 고대 그리스인처럼은 어려워도, 휴식은 어쨌든 마음의 바쁨을 잠시 내려놓는 행위다. 우산과 물컵의 이율배반을 가늠하고 사는 것이 헤겔만의, 마그리트만의, 또 우리만의 고뇌는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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