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국독립을 위한 무정부주의 운동 등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위조지폐를 사용하려다 발각되어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재판 끝에 1930년 5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수형번호 411번으로 중국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단재 선생은 형기를 3년 앞두고 지병이 악화되어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고국광복을 보지 못한채 한평생 일제와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순국하였다.
유해는 선생의 뜻대로 화장되었으며 그 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천안`청주를 거쳐 선생의 먼 친척뻘인 면장의 묵인하에 고향땅에 암장하였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사가 돌을 깎고 오세창 선생이 글씨를 새겨 선생의 묘소 앞에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령 신씨로 1880년 12월 8일 할머니 외가 동네인 대전시 중구 어남동(도리미 마을)에서 출생하여 7살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신광식이 사망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청원군 낭성면으로 이사를 하여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선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이상재, 신흥우, 김규식등과 함께 활동하고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의 예리한 필치의 논설기자로 활동하였다. 여기서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을 연재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0년 조선의 일제 강점이후 국외로 망명하여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1914년 윤세복의 동창학교에서 국사교육을 시키며 조선사를 저술하였다.
그 후 선생은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몰두하여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하여 우리의 근대 민족사학 정립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선생의 순국일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 언론가로서 한평생을 일제와 타협하지 않으며 꼿꼿하게 살아오신 선생의 불굴의 혼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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