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솥밥 먹으며 100년 정당을 맹세하던 여당은 어쨌든 두 동강이 났다.
권력의 단물을 실컷 빨아먹고서 하루아침에 “내가 빨던 젖이 아니야”라고 내팽개친 꼴이다. 돌아올 떡의 크기만 헤아리는 사람 앞에서 명분은 언제든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실리도 실리 나름. 보다 동양학적으로 말해보면 함께 사는 도리냐 사사로운 도리를 추구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집권층은 기초체력까지 바닥난 상태이고 명분만 비대한 것들은 보다시피 힘이 쭉 빠졌다. 성공한 정치, 정치적 성공은 명분과 실리를 조화롭게 챙기는 데 있는데, 안 그런 탓이다. 내 편과 네 편이 있는 정치는 경쟁 대상, 싸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정치는 그러기에 정교한 줄타기와 같다.
손오공 없는 삼장법사 있을까? 요괴들이 잡아먹으면 도를 얻는다는 맛있는 고기일 뿐, 그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손오공도 삼장법사 없이는 못된 장난질이나 일삼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 동서가 있고, 선후가 있고, 좌와 우도 엄존하는 한국정치다. 절차와 형식, 명분을 무시한 채 제 살길만 찾아 난파선에서 빠져나갔으니 ‘뺑소니 정당’소리까지 얻어듣는 것이다.
변수가 많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정치이긴 하다. 정치를 생물(生物)이라 하는 진짜 이유도 이것이다. 원칙과 명분과 실리의 균형이 사라진 지금은 살아 있어도 상당 부분 썩었을 것이다. 생물 얘기가 나왔으니, 오늘 떠날지 내일 떠날지 관망하는 의원들은 수면 위의 오리에 비유할 수 있겠다. 오리는 고요히 노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무지무지하게 바삐 물갈퀴를 놀린다. 명분과 실리는 상충관계이자 보완관계이면서 또한 절충관계다.
그 접점이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의론자 최명길은 “나같이 항복문서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찢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극렬한 반대파인 척화론자를 치켜세웠다. 조화의 과정이나 승화의 단계를 밟지 못한 명실상부(名實相符)란 없다. 정치권은 특히 명분과 미래를 먹고살 준비도 해야 한다. 물갈퀴를 놀리면서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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