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필자는 S 교사의 지적에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재반론하고자 한다. 동춘당의 최초 건축주는 동춘 선생의 부친 송이창 선생이고, 그것을 동춘이 옮긴 것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문제는 현 동춘당 건물이 동춘 선생이 옮겨 놓은 바로 그 건축물이 아니라 40-50년 전에 다시 옮겨졌을 가능성이다. 본인은 지난 칼럼에서 그 점을 지적하였다.
S교사는 “40 50년 전에 이전했다면 1950년 60년대로써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전후한 시기인데, 당시에 그런 경제적 여력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먹고살기도 바쁜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경제현실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론”이라고 했다.
40~50년 전이라면 우리나라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복구작업을 한창 벌이던 때라,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런 경제력이 있었겠느냐”는 추론은 그야말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필자는 그 당시 동춘당을 이전할 때 건축작업에 참여하였던 분의 증언을 가지고 그런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동춘당 서쪽 대문에 서쪽으로 방 2개 정도의 건물이 있어, 현종손이 증조부가 기거하였다는 증언과 함께 건물의 30~40보 전면에 동춘당 건물이 존재했다는 증언을 내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정황도 여전히 남아있다. 동춘당 마루 밑에 있는 흙에 왜 석회가 분쇄된 상태로 남아 있는지, 온돌방과 마루 밑과의 벽은 왜 황토 마감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도 그렇다.
또 섬돌은 다른 데서 사용하던 돌을 주어온 것이며, 건물 기단석은 왜 막돌을 사용하였는가 하는 점도 역시 의문점이다. 조선시대 내로라 하는 사대부가에서 당(堂)을 그렇게 세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둘째, 흰 벽 처리 문제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집을 지을 때 초가는 평민용과 양반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물론 건축 양식도 그 신분을 중시하여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궁궐을 제외한 양반 계급은 99칸을 넘을 수 없는 등 신분에 맞춰 가옥을 지어야 했다.
S교사는 벽을 만들 때 갈대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벽에 넣는 것은 갈대가 아니라 수수대다. 필자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마감벽 바르기 재료에 관한 흰색 석회로, 해초류로 미역 같은 걸 삶아서 소털 등과 섞은 물로 이겨 토수가 작업했다.
셋째, 현재 걸려 있는 동춘당 현판은 모조품이라는 점은 인정하였으므로 더 언급할 바가 없겠으나, 이 현판에 부분도 건축물 이전의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동춘당은 엄연히 국가지정 보물이다. 동춘당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왜 가짜 현판을 보아야 하는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 또는 어떤 서원이나 당(堂)의 현판도 이처럼 별도로 보관하는 경우는 없다.
본인이 지난번 ‘만신창이 된 보물 209호 동춘당`이란 주제로 글을 썼던 것은 문화재는 원형보존이 원칙이며, 그 관리는 소유주가 하여야 된다는 문화재 보호법의 명문이 계기가 되었었다.
이런 이유로 신문에 기고까지 하게된 본인의 졸고에 S교사가 관심을 갖고 지적해준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번에 S교사와 함께 결국 지상 토론을 하게 된 점 기쁘게 생각한다. 물론 대전 유일의 건축 보물인 동춘당이 제모습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두 사람이 다 같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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