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철 소설가 |
술과 책이 젊음의 모두인 줄 알았던 그의 체질에 어울리기도 하고 또 통 큰 전망과 장밋빛 인생을 차단해도 잡을 수 있는 ‘무엇`이 보일 것 같았던가. 그녀의 눈빛을 보석이 아니라 이슬이라 규정하던 그 즈음이다.
저무는 저녁 놀 보며 오두막집이나 ‘눈이 큰 여인`들을 떠올리던 삼류작가 스타일의 행복한 수채화를 그려보기도 했던 것 같다. 최인호 원작 ‘별들의 고향` 독파 후 수 년 간 그 늪에서 허우적거렸던 후유증이다. 라스트 신을 재생시키며 ‘경아가 불쌍해` 하며 함박눈만 우적우적 먹고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생이 청년기로 영원히 정지될 줄 알았으므로 황혼기의 굽은 등들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주기도 하면서 관념의 씨앗들을 널름널름 삼켰던가.
그러다가 그녀의 ‘깊은 사랑`에 화들짝 놀라 비로소 구체성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해 사월, 목련이 수제비처럼 뚝뚝 떨어지던 자취방으로 벗들이 몰려왔다. ‘타는 가슴이 있어` 하며 자취방 옆구리 걷어차면 번개탄 푸른빛이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술상 위에 필리핀의 아키노와 ‘80년 광주`와 루카치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동일방직 여공들이 뿌린 유인물과 불온서적들을 겁 없이 읽으며 ‘별 보는 마음` 쓰다듬다 보면 착한 만큼 희망이 넘쳤었다. 아, 그녀와의 행보를 위해 왜 지성으로 준비를 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거대한 골리앗과 한 판 승부를 꿈꾸었다. ‘몸이 더렵혀지면 자결하리라` 이를 갈던 격동의 그 시대 한 판 대결의 사연!
‘선생님들이 노가다냐`라고 하시(下視)하려던 몽매한 손가락질을 ‘노동의 신성함`으로 대응해야 했다.
안보독재에 길들여진 머릿속에 통일을 심어주는 게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그럴수록 진하게 쌓은 사연들이 배반의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나뭇잎처럼 툭툭 털어낼 각오를 세워야 했다. 웰빙과 인터넷에 길들여진 젊은 벗들이 쭈삣쭈삣 비켜나도 넉넉히 끌어안아야 했다. 구경꾼들이 골프나 볼링으로 장년의 건강 챙길 때 ‘겨울의 다짐` 떠올리며 뿌리털 내릴 터전 더 단단하게 다졌다. 콩나물시루 옆에서 아우성으로 뿌리
내리는 콩나물콩 크는 소리 듣다가 빈 가슴 열어주며 산맥과 오물 번갈아 추스렸다. 아픈 사랑이 더 깊음을 뼈아프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세월이 흘렀다. 그는 여전히 그녀와의 첫 사랑 약속 되새기며 붙박이로 머무른다.
벗들이 관료가 되어 영어회화 테이프 느긋이 듣고 잇을 때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 흰 자국을 남기며 이따금씩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빨 틈새가 벌어졌고 침 발라 가며 시험지를 세어야 한다. 마른 살비듬 같은 분필가루가 부스스 떨어질 때마다 갈라진 몸에서 터지는 그녀의 신음소리를 끌어안는다.
그녀는 전교조 말뚝 교사인 그와 천생 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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