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성빈 충남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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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동춘당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동춘 선생의 부친 송이창 선생이(現 동춘당 건물의 위치로 이전(건축)하였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동춘당은 본래 하얀 석회 벽인데 동춘당을 새로 지어 옮기면서 모래흙으로 벽을 칠했다는 것이다.
셋째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알려진 ‘同春堂(동춘당)`현판도 사실은 모조품으로 의심된다는 지적이다. L씨는 동춘당 지킴이로써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지적하였겠으나 사실을 왜곡시켰다는 데 커다란 문제점이 있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로, “안내문에 동춘(同春송준길의 호)선생의 부친 송이창 선생이 (現 동춘당 건물의 위치로) 이전(건축)하였다고 적혀있다”와 지금부터 40 50년 전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 것이 사실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것은 L씨가 안내판을 정확히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안내판에는 분명히 “동춘당은 송준길 선생이 아버지가 세웠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있고, 안내판 기록은 분명히 하자가 없다. ‘청좌와유고`에 “무술(1598년) 임란으로 잿더미가 된 것을 소제하고 남은 재력을 수습하여 작은 집을 짓고 편액을 청좌와라 하였다.
경술(1610) 3월에 담복을 입고 사당을 세우고 호군공의 묘갈을 세웠다”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알 수 있다. 또 ‘연보`와 「동춘당 가장」에 보면 “동춘 38세 때(인조 211643) 2월에 정침과 사당 및 동춘당을 건립하였다. 청좌공에 옛집은 세월이 오래되어 다 무너져 감으로 구기 북편에 구성하였다. 조상공 익이 당기를 지었다”로 밝히고 있다.
이것은 동춘선생이 38세 때 동춘당 고택과 사당 및 별당인 동춘당을 다시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L씨의 주장대로 지금부터 40 50년 전에 이전했다면 1950년 60년대로써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전후한 시기인데, 당시에 그런 경제적 여력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먹고살기도 바쁜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경제현실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론일 것이다.
둘째로 “동춘당은 원래 하얀 석회 벽이었는데 옮기는 과정에서 흙벽으로 바뀌었다”는 부분이다. L씨는 우리 민족의 상징은 흰색인데, 흰옷과 흰 이불과 함께 기와집의 벽도 흰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 사대부가의 건축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온 잘못이다.
우리나라 전통벽은 일반 민가에서 주로 썼던 흙으로 이겨 바른 흙벽, 고운 새벽 흙(고운 진흙에 잔모래가 섞인 빛깔이 누런 흙)으로 바른 새벽, 강회를 괴어 모래를 섞어 바른 회사벽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대부가의 건축은 전통적인 벽면인 새벽이다. 이 방식은 초벽은 삼벽조(갈대를 가운데 놓고 양쪽에서 바르는 맞벽치기 방식으로 예부터 지상에 집을 지을 때 벽면을 바르는 전통적인 벽)로 한 후에 재벽은 새벽으로 발랐다.
셋째 “동춘당 현판이 본래 온돌방 쪽 추녀 밑에 걸려있었는데 지금의 위치에 있는 중앙으로 옮겼다”는 것과, “진짜는 금고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동춘당 현판은 원래 지금의 위치인 가운데 있었다.
5,6년 전 종중 분규 때 어느 종원(宗員)이 현판을 떼어 종손가에 보관해 두었던 일이 있어, 분실을 우려한 종중에서는 현판을 찾아내어 그대로 모각하여 동춘당에 걸게 하고 진짜는 종중 사무실에 보관 중에 있다.
L씨가 우리 지역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여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일은 관심과 애정만으로 부족하다. 철저한 고증 하에 일반인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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