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골목은 저마다 만화영화 주인공을 자처하는 개구쟁이들의 연기(?)로 떠들썩했고. ‘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67년) ‘황금철인’(68년) 때가 그랬고, ‘로보트 태권V’(76년)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77년) ‘똘이장군’(78년) 때가 그랬다.
TV 애니메이션에 치이고 디즈니와 일본 아니메에 밀렸지만 우리 애니메이션은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다. ‘로보트 태권V’의 귀환과 잇달아 개봉되는 토종 애니 ‘천년여우 여우비’가 한국 만화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파랑새였으면 좋겠다. 한국 만화영화의 미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꿈과 희망이라는 선! 물을 주고 싶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30년 만에 돌아온 세계 최초 무술 로봇
로보트 태권V
감독 김청기
줄거리가 어땠더라. 못생긴 외모 때문에 국제회의에서 망신을 당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카프 박사가 있었어. 그 카프의 음모에 맞서 훈이가 아버지가 남긴 태권V와 함께 세계 평화를 지켰었다. 엔딩에서 지구정복을 꿈꾸던 말콤 장군의 정체가 사실은 몸보다 머리가 큰 카프 박사로 밝혀졌었지 아마.
고생담은 전해 들었다. 원본필름은 잃어버렸고 4년 전 영화진흥위 창고에서 복사본이 발견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지. 널 살리기 위해 2년간 연인원 2500명이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에 매달렸다고 해.
사운드는 복구가 불가능해 음악과 대사 모두 돌비 5.1 채널 입체음향으로 다시 녹음했고. ‘세월이 가면’의 가수 최호섭이 6살 때 부른 주제가도 목소리가 흡사한 성우가 다시 불렀다고 하더군.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드라마가 툭툭 끊기고 난데없는 대사가 나오는 걸 보면 세월을 속일 순 없나 봐. 그래도 괜찮아. 추억이 세월과 상관없이 되살아나던 걸. 다 함께 일어나 박수치며 주제가를 불렀던 그 시절 말이야.
신철 신씨네 대표는 앞으로 2∼3년에 1편씩 ‘로보트 태권V’ 시리즈를 제작하고 일본의 건담 같은 캐릭터로 키워나가겠다고 했다. 이젠 자주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이번 복원판 개봉은 그 첫 테이프인 셈이네.
여우 소녀 첫사랑에 눈뜨다
천년여우 여우비
감독: 이성강. 목소리 출연: 손예진, 류덕환, 공형진
‘마리이야기’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성강 감독이 5년만에 내놓은 두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우리 전래의 구미호 전설에게 이야기를 따와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하다. 서정성이 짙었던 ‘마리이야기’보다 훨씬 경쾌해졌고 날씬해졌다.
풍성한 캐릭터에 빠른 이야기 전개, 섬세한 감정 전달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진일보라 할 만하다. 씩씩한 여우비가 거울을 보며 가슴에 손을 얹기도 하고 배도 부풀려 보는,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의 설렘을 그린 장면이나 황금이의 영혼을 되살리려 애쓰는 여우비의 애처러운 마음은 관객의 가슴에 울림을 전할 만큼 잘 살아났다.
기술적 완성도도 꽤 만족스럽다. 3D 레이아웃 기법을 이용해 만들어진 캐릭터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한국 애니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던 칙칙한 색감은 완벽히 사라졌다. 컷으로 오려내어 보관하고 싶을 만큼 화사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득하다. 한국 애니도 이 정도 수준이면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듯하다.
크로스 오버 뉴에이지 뮤지션 양방언이 음악을 맡았고, 여우비와 황금이의 목소리는 각각 손예진과 ‘천하장사 마돈나’의 류덕환이 맡아 연기했다.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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