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전 중도일보 주필 |
문후에 대한 여론 추이는 구구각색이지만 찾아간 후보군의 속내는 ① 과거의 앙금을 씻기 위해서 ② 선배에 대한 의례적인 심방 ③ 한 수 배우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울지 모른다. 이를 놓고 꼬집는 측에선 갈려면 진작 찾아갔어야 옳았다는 평과 함께 영·호남의 영향권을 의식한 ‘손익계산’에서 취한 행동이라 치부한다.
문제는 전직대통령들의 향후 거동이다. 혹, 특정지역 계파를 통한 섭정(?) 같은 걸 생각한다면 우리 정치의 앞날은 불행해질 수 있다. 그러니 전직들은 초연하게 중립을 지켜주길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지방분권, 지방화를 외치는 세상인데도 우리 전직들은 모두가 서울을 고수하고 있다.
권좌에서 물러나 낙향을 한 프랑스의 거인 ‘드골’, 은퇴 후 지방에 은거하며 도자기를 굽는다는 ‘호소카와’ 전 일본총리, 농장을 거두며 충남 아산에까지 건너와 헌집을 고쳐주던 ‘지미카터’ 전 미대통령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인가. 대선가도 초반인데도 여야진영은 안팎으로 시끄럽다. 여당의원의 탈당선언, 김근태, 정동영에 대한 견제, 고건 옹립설, 벌써부터 터져 나오는 상대방 흠집 내기는 여야가 다를 바 없다.
고건에 대해서는 우유부단설, 특정후보의 좌파시비,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한나라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론조사결과 1, 2위 간에도 신경전은 가열하다. 이명박은 ‘노가다’라 비아냥거리고 박근혜는 자질은 좋으나 정치훈련에 앞서 공주(公主) 수업부터 받아온 인물이라는 등 벌써부터 흠집 내기에 열을 올린다.
민주주의가 최선최량의 제도이긴 하나 말싸움으로 시작, 그것으로 정력을 소진한다는 자조 섞인 말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가장 서구적인 체질을 지녔던 인도의 ‘네루’총리도 정책에 있어 사회주의 수법을 원용했다고 이기죽거리는 이도 있었다. 이렇듯 정치란 어려운 작업이다.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은 TV에서 임기 안에 챙길 일을 열거하다 근자의 착잡한 심경을 여과 없이 토로했다.
“말을 타면 탔다고 나무라고 서 있으면 왜 말을 타지 않느냐고 탓하니….” ‘이솝’의 우화 ‘부자와 당나귀’를 원용하고 나섰다. 10년, 수십 년 미뤄온 갖가지 난제를 매듭짓고 미흡한건 주택문제인데도 일관되게 비난뿐이라며 일부 ‘미디어’의 포화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앞으로는 할 말은 하고 부당한 공격엔 맞서겠다며 특유의 직선논리를 들고 나섰다.
권력과 언론관계란 이런 것이다. 언론의 특성은 권력에 대한 견제에 있는 만큼 일상 껄끄러운 관계를 갖기 쉽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 쪽을 택하겠다’던 ‘제퍼슨’ 미대통령은 막상 집권을 하자 그 어느 대통령보다 신문과 불화했다는 일화는 그래서 유명하다. 통치란 그렇게 힘들고 애매한 것이다.
이왕 우화를 꺼낸 김에 하나만 더 곁들이자. ‘걸리버 여행기’에선 ‘소인국’, ‘대인국’이 갈등하는 이유가 ‘소인국’에선 계란을 먹을 때 뾰족한 쪽에 구멍을 뚫고 빨아 대는데 ‘대인국’은 두툼한 쪽에 입을 댄다고 수순을 놓고 공방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우리 현실에 이를 대입한다면 이런 이야기일수 있다.
군비경쟁보다는 ‘햇볕정책’을, 경제에 있어 성장우선이냐, 분배가 먼저냐는 시비, 친미냐 주권수호냐에 대한 공방 등 모두에 있어 우리는 ‘우화’ 선상에서 생을 영위한다는 인상이다. 아직도 내편 아니면 이단(異端)이요, 완승 아니면 자멸,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이분법(二分法)논리가 몸에 배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타협이나 균형감각 완충이나 조화를 이뤄내는 솜씨가 얼마간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란 ‘미리 계산된 사기술’이니 제 마을 실개천 징검다리 손질은 접어두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성좌(星座) ‘은하수’에 구름다리를 놓겠다고 호언하는 게 정치인이라 매도한다. 그래서 우리의 광장은 늘 시끄럽다. 하지만 이것을 추스르고 봉합, 타고 넘는 게 정치인들의 할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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