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인 한신교회 목사 |
‘잭 캔필드’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이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라는 책인데, 이 책에 보면 서로 친한 친구사이인 암 전문의 두 사람이 주고받는 간단한 대화 한 토막이 실려 있습니다.
한 의사가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도대체 이해가 안돼. 자네나 나나 전이성 암 환자에게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만큼 똑같은 스케줄에 따라 똑같은 용도로 처방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나는 22%밖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네는 74%나 성공을 하지? 같은 전이성 암을 치료하는데서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야. 자네,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그러자 그의 친구가 이렇게 대답 합니다. “여보게, 자네나 나나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만큼 처방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비결이 있다고 그러는가?”
두분의 의사는 암 환자에게 에토호사이드(Etoposide), 플라티눔(Platinum), 온코빈(Oncovin), 하이드록쉬리아(Hydoxyurea), 이 네 가지 약을 똑같은 양으로 똑같이 처방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분은 22%의 치료 성공률을 거두고 다른 한 분은 74%의 치료 성공률을 거둔 것일 까요. 한 분은 위의 네가지 약 이름의 첫 글자를 순서대로 따서’에포(EPOH)’를 처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은 똑같은 약을 쓰면서 위의 약 종류의 순서를 바꾸어서 ‘호프(HOPE)’를 처방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다른 것이라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희망이 없이 약을 처방했고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주면서 약을 처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판이하게 나타났습니다.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처방 할 때는 10명중에 7명이 죽어 나갔는데 비해 똑같은 처방을 하는 데도 희망을 주었을 때는 10명중에 7명이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둡고 암울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절망을 안겨 주고 있는 실정이고, 제 2의 I,M,F를 걱정 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회는 불안하고 지역감정과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상대성 절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좌절이 바로 상대성 절망입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이웃 앞에서, 극복할 수 없는 사회조직 앞에서, 올라가는 물가와 얇아지는 월급봉투 앞에서, 부동산 투기로 한 몫 잡은 사람들의 큰 웃음소리 앞에서, 우리는 ‘상대성 절망을’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대성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호프(HOPE)’를 처방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아프리카 남단에 희망봉이 있습니다. 그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르뮤 디아스인데, 그는 1488년 그곳을 발견하고는 이름을’폭풍의 곶’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후인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곳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 왕 조앙 2세의 명을 받고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 폭풍의 곶을 돌아 마침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자 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희망의 곶’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습니다. ‘폭풍’에서 ‘희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무슨 일이건 그 일 자체에 희망과 절망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위기가 닥치거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희망 쪽으로 마음을 다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 자세에 따라 절망도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는 우리들 모두가 ‘희망 쪽으로 마음을 다잡아서’희망을 이야기 하고, 만들고, 가꾸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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