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에서 탈출해 도피생활을 하던 현우는 윤희의 집에 숨는다. 산골집에서 평화롭던 둘의 일상은 동지들이 모두 붙잡혀 갔다는 소식에 죄의식을 느낀 현우가 짐을 싸면서 깨진다. 서울로 간 현우는 붙잡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세월이 흘러 17년만에 출옥한 현우는 윤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된 정원’이었던 옛집을 찾아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원작소설 ‘오래된 정원’이 윤희의 가족사에 담긴 시대의 아픔을 연애담으로 풀어냈다면 임상수는 담담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뽑아냈다. 영화는 이념과 사랑 중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고는 사랑에 방점을 찍는다. 소설이 낭만적이라면 영화는 ‘쿨’하다.
현우의 결기어린 투쟁은 영화엔 없다. 도피 과정에서 느낀 부끄러움만 큼직하게 드러난다. 엄혹한 시대도 거리를 둔 관찰자의 미장센으로 덤덤하게 드러난다. 사랑이 중요한 윤희가 이같은 영화의 태도를 서슴없이 웅변한다. 조직의 희생양이 돼 감옥에 들어가겠다는 운동권 후배를 말리며 윤희는 말한다. “인생 길어. 역사는 더 길어. 우리 좀 겸손하자. 너 그거 하지마. 조직인지 지랄인지.”
임 감독은 역사의 관찰자 혹은 세대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윤희를 내세워 화해의 손을 내민다. 윤희는 시대의 희생양을 자처하지 않고 부채의식도 없다. 미혼모의 길을 원망 없이 홀로 걸어가며 주변을 감싸안는다. 그런 포용이 세대를 넘어 시대와 시대를 화해시킬 수 있다고 들려준다. 젊은 현우와 늙은 윤희를 한 화폭에 담은 원작 속 윤희의 그림에 더해 윤희 아버지, 딸, 젊은 윤희까지 같이 그려 넣은 영화 속 그림은 시대와 시대의 화해를 청하는 손내밂 같다.
염정아의 호연이 눈에 띈다. 과거로 설정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스타일과 똑 부러진 말투를 보여주는 염정아는 그간 출연한 어떤 영화에서보다 아름답고 당당하다.
임상수 영화 특유의 면도날 같은 시각과 냉기를 선호하는 관객들이라면 다소 밋밋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 또 치열하게 80년대를 살아낸 이들로부터의 평가도 극명하게 엇갈릴 것 같다. 임 감독으로선 따뜻한 시선으로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논란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12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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