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폴 오스터는 '빵 굽는 타자기'란 표현을 썼다. 글로 생계를 꾸린다는 의미다. 고백하건대 필자도 눈뜨기가 무섭게 '밥 버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보면 간혹 겁이 더럭 나지만 그만큼의 절박감이 그만큼의 창조의 본질이려니 하고 마음을 다그칠 때가 있다.
역사에서는 어떠한가. 그 같은 절박함이 어떻게 작용하고 길항(拮抗)하는가. 역사적인 성공의 절반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얄밉게도 토인비가 선점해버려 요긴하게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대신에 엊그제 공주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유족의 밤 행사를 본 소회나 한 토막 풀어놓으려 한다.
내막은 신문에 몇 줄 소개된 그대로다. 동학혁명을 유발시킨 학정의 대명사이자 탐관오리 조병갑의 증손녀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동학군 후손들에게 납죽 큰절을 해버린 '사건' 말이다. 전봉준, 손화중과 나란히 농민 지도자 반열이었던 김개남의 손자에게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일로 사과했다. 역사학도가 되어 억울한 가족사를 바로잡고 싶었다던 한때의 심경이 모종의 절박함으로 바뀌었음일까.
왜냐고, 정말 그러냐고 따지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 않다. 조선왕조 시각에서는 원님의 후손이 '동학농민반란군' 유족들의 한풀이가 될 때까지 백배사죄하겠다는 게 중요하다. 사죄의 현장은 수십만 동학군이 처절하게 죽어간,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의 불가분성을 얻은 우금치, 바로 공주 땅이다. 이 정권 들어 3보1배, 경로당 절, 큰절, 땅바닥 맞절 등 각양각색의 절을 신물나도록 보아 왔지만 이번 108배는 유달리 특별했다.
각별한 것은 이뿐 아니다. 하필 역사 바로 세우기를 부르짖는 참여정부의 홍보수석을 그녀가 지낸 자체가 드라마 소재 감이다. 보다 드라마틱한 건 언론을 "불륜 폭로하겠다는 협잡꾼"에나 비유하고 "역사적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던 심한 알레르기에서의 태도 변화다. 가족사든 근현대사든 이분법으로 명쾌히 못 나누는 다층적인 면면은 있고, 그런 측면을 지나치게 무시했기에 승패만 있었지 공유하고 공존하는 역사가 드물었던 듯도 하다. 어디 동학의 담론, 동학의 공간뿐이겠는가.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역사적 과오가 되풀이된다고 시시콜콜 늘어놓는 것은 좀 예스러운 일이다. 봄은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거나 오지만 역사의 진실은 놔두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탐관오리의 후손과 동학혁명 주역들의 후손의 역사인식이 꼭 일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와 민족 앞의 빚 앞에서 금전적 부채의식은 하잘것없을 수도 있다.
원인, 과정, 결과를 잠시 접고 눈여겨볼 부분은 "(동학 유족을) 부모님처럼 따뜻하게 모실 기회를 갖고 싶다"며 차이를 극복하려는 그 시도다. 조상을 선택할 권리도, 조상 팔아 부를 누린 적도 없다던 그 생각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더 인상적인 것은 동학 후손도 나쁜 일 하면 '우리의 적'이라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의 답례다. 진실, 화해, 공존, 용서, 타협, 소통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하는 자리였다. 갑오년 말목장터 감나무 밑 열변은 아직 '묵은' 이야기가 아니구나 싶었다.
고작 108배로 사죄하려 하느냐, 8만 4000배로도 어림없다며 진정성을 의심하건 말건 자유다. 절(拜)은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하심(下心)이다. 아닌게아니라 복부비만과 탈모와 요통에 좋다니 국민체조하는 폭 잡고 108배를 할 수는 있겠다. 어쨌든지 김장배추 속에 숨은 속살처럼 얼굴을 내보였기에 굳은 얼굴이 펴지며 용서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만은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번뇌인지 부처인지는 염주를 소유한 사람에 달렸으니 알 길이 없으나 믿고 또 믿어본다. 변화는 절박한 사람들의 주제이지만 절박감 때문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 속 실패의 절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다던가. 그 자리에서만은 '피해자'는 '가해자'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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