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지옥이면 환상도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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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지옥이면 환상도 악몽…

  • 승인 2006-11-30 00:00
  • 안순택 기자안순택 기자
어둡고 기괴하고 무거운 환상동화
신비로운어둡고 기괴하고 무거운 환상동화
신비로운 환상세계 폭력강도 높아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이렇게 아프게 다가오는 판타지 영화는 처음 봤다.

여기 참혹하다 못해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 부러진 분필로 환상의 출구를 만드는 소녀가 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오필리어. 처참한 권력 싸움을 광기어린 자살로 고발하는 ‘햄릿’의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5년이 흘렀다. 하지만 숲 속에선 반란군의 항거가 계속되고 있었다. 군인의 아이를 가진 엄마를 따라 숲 속에 오게 된 오필리어(이바나 바쿠에로)는 긴장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온기라고는 없는 냉정하고 잔인한 대위와 임신으로 인해 힘겨워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오필리아가 찾은 유일한 출구는 요정 이야기.

요정이 오필리어를 찾아오고 요정의 손에 이끌려 미로로 들어간다. 그런 오필리어를 기괴하고 거대한 요정 판(더그 존스)이 기다리고 있다. 판은 오필리어가 지하왕국의 공주였다며 다시 공주로 돌아가기 위한 세 가지 미션을 제안한다. 그 미션은 용기와 인내, 희생에 관한 불가능한 모험이다.

아름다운 건 소녀 뿐, 그녀를 도와주는 요정의 형상은 천사보다 괴물에 더 가깝다. 거대한 두꺼비, 눈알을 빼놓고 잠든 눈 없는 괴물, 양의 뿔과 금빛 수염을 달고 걷는 요정 판 등 환상세계의 생명체는 신비롭지만 어둡고 기괴하다. 황량하고 무겁다.

‘판의 미로: 오필리어와 세 개의 열쇠’의 놀라운 점은 판타지와 현실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괴물 두꺼비는 파시즘을 추종하는 정부군과 닮았고, 환상의 세계는 현실만큼이나 직설적인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폭력의 강도는 더 세다. 갈등과 학살이 일상이던 독재 시대의 그늘은 차마 정면으로 응시하기 어려운 고통스런 장면들로 대치된다.

‘헬보이’ ‘블레이드 2’를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작심하고 “환상은 현실의 도피처가 아니다”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현실이 지옥이 될 때 환상 역시 무시무시한 악몽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이 낯설고 기이한 환상 동화로 들려준다. 왜 새 아버지와 결혼했느냐고 묻는 오필리어에게 엄마는 답한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겠지만 현실은 동화 속 세상과 달라.”

성인용인 잔혹한 묘사와 델 토로 특유의 악취미에도 불구하고 ‘판의 미로’는 아름다운 영화다. 오필리어의 선택은 과연 환상세계와 현실에 평화를 가져올까. 어쩌면 현실이야말로 안락한 환상으로 채워진 도피처일지도 모를 일이다. 15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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