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있는 마을 이름이다.
이런 지명의 경우에는 혐오감이나 부정적 이미지 등을 감안할 때, 그리고 해당지역 주민이 원한다면 이미지 변신을 위해 이름을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에겐 이런 얘기를 꼭 광복절이나 삼일절이나 한글날되면 이런 얘기가 반짝했다, 금세 게눈 감추듯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노인의 날만 노인 생각하고 어린이날만 어린이 걱정하는 식이다. 근거를 왜곡하거나 격하시킨 경우는 물론 일본식 이름을 개정하면서 우리 손으로 왜곡한 경우까지 함께 가려내서 한꺼번에 손질해야 할 것이다.
#고을의 역사가 숨쉬는 지명
일설에 따르면 태전(太田)은 조선 태종 때 얻은 이름이라 한다. 한때 일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태전 이름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제법 기세 좋게 일었었다.
또 일설에 따르면 이런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 여행 도중 '태전역'에 잠시 내리게 되었다. 이때 이토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태전을 대전이라고 고치라고 명한다. "대전이라 고쳐 부르게"라는 즉흥적인 이 한마디에 대전이 되었다는 속설 비슷한 얘기도 전해 내려온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정설로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참으로 맥빠지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땅이름에도 고을의 특성이나 내력이 묻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울 망우리의 망우(忘憂)는 글자 그대로 근심을 잊는다는 뜻.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東九陵) 터를 정하고 나서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내려오며 근심을 잊었다는 유래를 머금고 있다.
경기도 연천에 고문리(古文里)라는 동네가 있는데, 고문(拷問)이 아니라, 코를 물렸다는 데서 '코물리'와 비슷한 음인 '고문리'가 되었다는 좀 코믹한 사연이 얽힌 곳이다.
왜 그런고 했더니,
옛날 옛적에 줄타기 광대의 아내를 탐내던 고을 원님이 살았더란다. 참다못한 원님은 급기야 광대를 죽이고 그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 일은 못 치르고 사정없이 코만 물렸음은 물론이다.
#자연친화적인 옛 지명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을 보면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절로 고개가 수그려진다. 매미가 많으면 매미실이요, 마을 뒷산에 달이 휘영청 환장하게 떠오르는 동네면 다라실이라 했으니까.
전라선을 타고 가다 만나는 '임실'을 한번 보자.
순우리말 지명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운 사람(임)이 사는 마을(실)인 것이다. '任實'이라고 억지로 적고 있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임실이 처가동네인 사내들은 참 행복하기도 하겠다. 임이 사는 동네. 임 계신 곳…….
이렇듯 이름 하나 짓더라도 자연에 따랐으며 순리를 좇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나비실, 다라실과 같은 정겨운 우리 이름은 한자문화의 영향으로 접곡(蝶谷)이나 월곡(月谷)으로 그예 바뀌게 된다. 그나마 일제 침략과 함께 일본지명으로 고쳐지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불발로 그쳤지만, 90년대 초 홍성군과 의회에서도 홍주(洪州) 이름 되찾기 사업을 전개해 필자가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제자리를 찾자면 충북 청원군은 청주군으로 바뀌어야 할 것인데, 청주시와 시·군 통합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다. 강원도 명주군이 강릉군으로 바뀌지 않고 강릉시와 시·군 통합을 한 선례가 있으며 충남 천원군과 충북 제원군도 결과적으로 천안과 제천 이름을 되찾았다.
#풀어야 할 일제 유산
엄청나게 늘어난다. 개중에는 일제에 의해 붙여진 것도 있고 행정편의상 뉘 집 강아지 이름짓듯 마구잡이로 된 것도 있다. 왜곡된 법정동이나 자연마을 이름 속의 왜색뿐 아니라 산과 강, 공원과 놀이터 등의 고유지명까지 생각하면 할 일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일제가 고의로 의미나 어감이 나쁜 행정명칭으로 바꾼 사례에 대해서는 지체 없이 개선할 필요가 있다. 민족정기 말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 행정자치부와 자치단체에서 행정구역 명칭과 유래에 대한 일제 조사를 벌인 결과를 토대로 지명 정비를 추진하고 것은 잘한 일이다. 일제의 횡포로 인해 왜곡된 지명이라면 민족정기를 되찾는다는 명목만으로도 개정을 머뭇거릴 사안이 아니다.
또 통일 후에는 북한 문제가 걸린다.
다른 건 놔두고, 그쪽에서는 함경도 신파(新派)를 김일성의 전처 이름을 따서 김정숙군(金貞淑郡)으로 바꿔 놓았는가 하면, 풍산(豊山)은 김일성 삼촌 이름을 따서 김형권군(金亨權郡)으로, 후창(厚昌)은 김일성 아버지 이름을 따서 김형직군(金亨稷郡)으로 개칭한 일이 있다.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어처구니없고, 레닌이 공산혁명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로 개명했던 도시가 소련 공산당의 몰락과 함께 '페테르스부르크'로 환원된 사실을 상기하면 씁쓸할 뿐이다. 요즘 행정도시의 새 이름 중에 '세종'이 후보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세종대왕이야 자손만대 우리 민족의 성군으로 추앙받으실 걸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름을 자의적으로 지어서도, 함부로 고쳐서도 안 된다.
애향단체들의 집단민원이 있다고 무턱대고 바꾸지도 못한다. 무엇보다 역사성도 가벼이 볼 수 없다. 역사는 창조와 변화로 이루어진다. 대전광역시 서구 갈마동이 그 옛날 공주군 천내면 갈마리였다는 점을 들어 환원을 주장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잘못을 바로잡는 차원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지명 가운데 일본식 행정명칭이 많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일제 때 길과 동네를 통(通)이나 정(町)으로 부르다가 로(路)와 동(洞)으로 바꾸었지만 그 이름 속에 일제 잔재가 묻어 있는 사례가 상당수에 이른다. 일상 속의 언어, 서식, 풍속과 함께 지명에도 역사성이 있는 만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차원에서라도 합리적으로 바꿔야 마땅하다.
다만 행정명칭을 개정한다 해도 지방자치법 규정과 절차가 까다롭고 주민등록부 등 각종 공부와 법령을 뜯어고쳐야 하므로 막대한 행정력과 예산이 드는 작업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해야 할 일이다. 어감이 좋지 않거나 놀림감이 되는 동네이름도 당연히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다음에 어감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름을 정리해 보았다.
몇 곳은 캡처사진으로 싣는다.
첫째, 방광마을(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유방동(경기도 용인시 유방동)이 있고 손목마을(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대가리마을(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 방구마을(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방구리)이 있다. 이쯤 되면 목욕마을(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목욕리) 생각이 절로 난다.
둘째, 파전마을(경상북도 군위군 의흥면 파전리)이나 소주마을(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계란마을(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계란리), 국수마을(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국수리)처럼 아주 맛있는 마을도 있다.
셋째, 연탄마을(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연탄리), 망치마을(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망치리)처럼 유용한 생필품이나 도구가 잔뜩 들어 있는 마을도 부지기수.
넷째, 노래 잘하는 가수마을(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이 있는가 하면 충청도에는 운 좋게 대박마을(연기군 금남면 대박리)도 있다.
마지막으로, '설마(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했더니 '고도리'마을(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고도리)이 있고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원통마을'(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고…….
#새 이름 작명도 신중해야
위의 지명들이 잘못 됐다는 뜻은 아니고, 한자로 풀면 의외로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 잘못된 지명이라는 뜻도 아니며 결코 비하해서도 안 된다.
다시 본론으로 가서, 잘못된 지명을 그대로 두고 일제문화 청산이나 제대로 된 지역문화 창출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원형이 훼손된 지명, 이름이 중복돼 행정상 혼란을 주는 지명도 이 기회에 개정작업 대상에 포함시켰으면 좋겠다.
대체할 새 지명 선정에도 역시 신중해야 할 것이다. 법률이나 조례 제정 이전에 각 지역 지명심의위원회나 중앙지명심의위원회에 의한 본의 아닌 왜곡 또한 절대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애국'이 직업인 사람들에 의해 목소리만 잔뜩 부풀리다 시들해지는 경우가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지명 개정에 있어서 유념할 또 하나는 역사성과 애향심을 모두 살리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옹녀가 서방 갈 듯 마구 고쳐야 하나,
춘향이 수절하는 짝으로 그냥 두는 편이 좋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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