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초기에는 식민지를 겪은 당시의 미얀마로서는 상당한 진취적으로 보였으나 그 이전보다 더 가난해지고 위정자들만의 특혜와 부패로 결국, 1987년에는 유엔에 의하여 세계최빈국의 하나에 포함되기도 한다. 그리고 26년 집권후인 1988년 국민의 힘으로 네윈은 물러나고 민주화가 될 줄 알았지만 신군부에 의해 미얀마는 미얀마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의 중심지인 차이나타운을 택시로 가는 도중 택시운전사는 어디에서 왔느냐며 한국의 박정희 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얀마사람들도 박정희대통령시의 업적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는 등, 한국가전제품이 좋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미얀마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상당한 놀라움이었다.
어제가 ‘10·26’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27주기이기도 했다. 그의 재임 18년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린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진정 어떠해야 하는가?
사실, 박정희를 평가하는 데는 망설임과 상당한 용기도 필요하다. 자칫하면 유신독재를 지지하고 민주화 역행을 찬성하는 수구골통이 될 수 도 있고 장녀인 박근혜씨도 대선주자로 떠올라 자칫하면 정치에 휩쓸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쿠바의 카스트로나 네윈, 박정희는 장기집권자였으나 카스트로나 네윈보다는 박정희는 제3세계에서 그의 업적과 리더십이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100달러 전후인 61년과 약 45년 뒤인 현재는 160여 배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당시의 우리나라와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감정이 있었던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포항제철, 고속도로 건설 등은 박정희 없이는 사실상 어려웠던 업적이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당시의 고임금과 고생산비의 일본의 경공업을 우리가 받아 발전시겼으며 특히 외자유치를 통해 포항제철건설은 철강산업뿐만 아니라 관련 산업인 자동차, 가전제품, 건설산업에 이르기까지 발전시켰을 뿐아니라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가는 지름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자원이 없고 시장이 약한 당시의 한국이 가야할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일본의 모방을 하였지만 보조금, 감면세금, 재정투융자, 그리고 특별감가상각 등으로 이어지는 산업정책의 정석을 보여주는 대단한 업적이다.
일부에서는 박정희 모델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 의견에 반대하는것은 아니지만 지금 디지털·글로벌시대에 이러한 모델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까지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등소평 역시 오늘의 중국이 있기 까지 대단한 혁신을 한 지도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방을 하여 자본주의국가의 외국자본을 받아들여 성공시킨 그의 리더십이야말로 사회주의 구가는 물론, 전 세계를 통하여 막강한 중국의 경제력에 뗄수 없이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 네윈, 등소평, 카스트로 등 수많은 장기 집권자중에 박정희와 등소평이 높게 보이는 이유는 학술적인 어려운 용어보다 단순하게 평가하면 그 전보다 백성들을 배불리 잘 살게 만들었다는 단순한 논리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그들의 잘못된 점까지도 높게 평가하지는 않고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후 정권을 잡았던 최규하 전 대통령도 수많은 비화를 가슴에 안고 서거했다. 살아있는 대통령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 거리로는 존재할 수 있어도 업적과 평가는 다르다.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을 위한 선택이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그리고 이것이 후일에 평가된다. 네윈과 박정희를 평가하면서 느낀 점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