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연은 영혼을 울린다
가을 냄새 물씬한 詩같은 영화…
가을이 깊어 가면 사내들은
쓸쓸함에 한껏 젖었다가 쓸쓸하지 않은 시간으로 달려가고 싶은 거다. ‘가을로’의 남자 현우도 그랬다. 옛 사랑의 그림자를 따라 가을 속으로 길을 떠났다.
그날, 현우(유지태)는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민주(김지수)와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날따라 현우는 일이 많았고, 민주는 혼자 가기는 싫다고 했다. 민주 혼자 들른 삼풍백화점. 뒤늦게 도착한 현우의 눈앞에서 백화점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사라지는 게 아쉽지 않아요?” 우이도의 모래산 앞에서 민주는 사라짐을 말한다. 김대승 감독은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에 이어 ‘가을로’에서도 사라짐 혹은 상실을 이야기한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충격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동시대를 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슬픔과 어이없음으로 상실의 아픔을 확대하고, 살아남은 자가 그 끔찍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 그 방식을 보여주려 한다.
현우는 민주가 남긴 여행노트,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을 따라 길을 떠난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마다 한 여인과 마주친다. 현우는 이 여인 세진(엄지원)에게서 민주를 본다.
현우와 세진의 여행길은 민주의 빈자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살아남은 자의 절절한 고통이 느껴져야 하고, 낯선 여인에게서 사랑했던 여인의 체취를 맡았을 때의 흔들리는 심경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곳에 현우는 없다. 거꾸로 민주의 영혼이 빈자리를 메운다. 민주의 과도한 내레이션은 이 영화를 죽은 자, 민주의 영화로 만들어 버린다. 민주의 무게에 눌려 살아남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잃고 자꾸만 왜소해가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김 감독은 상실의 아픔을 말하기보다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와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픔을 드러내놓곤 아픔을 말하기보다 서둘러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는 쪽으로 가려고 든다. 그 탓에 어둠에 묻혔던 상처를 끄집어냄으로써 마음의 병을 치유한다는 플롯은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상처와의 진정한 마주침이 없는 때문이다.
‘가을로’의 진짜 주인공은 이쯤에서 등장한다. 이 땅의 아름다운 풍광이 주인공이다. 우이도의 모래언덕을 시작으로, 담양 소쇄원, 울진 불영사, 영월 동강 등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우리 산천이 가장 아름다운 가을 빛깔을 내는 순간을 따라다니며 정성들여 찍은 화면들은 영혼이 맑아지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대자연은 정말 영혼을 울린다.
가을엔 소설로는 절절한 사랑을 말하는 소설, 아니 소설보다 시(詩)가 어울린다고 여기는 이들이 좋아할만한 시 같은 영화다. 김대승 감독의 감수성과 유지태와 김지수, 엄지원의 절제된 연기는 사랑과 이별이 교차하는 계절인 가을과 딱 어울린다. 가을에 맛보는 별미라 해야 할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15세 이상.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