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를 보면서는 호크가 달렸던 교복을 입고 다녔고 통기타를 짊어지고 다니던 세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와 입영전야나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송별회를 하고 입대를 하던 모습, 한 친구는 시위대의 군중이고 입대한 다른 친구는 시위대를 진압하기위해 방망이를 들어야만 했던 가슴 아픈 세대들의 이야기가 소재였기에, 그 시절에 청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아마도 필자와 같은 기분으로 소주잔을 기울인 사람이 더러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주가 지나지 않아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두 번째 날을 보냈다. 필자는 여러 장르의 공연 중에 특히 오페라에 애착이 강하다. 88년도에 대전에서 제작된 최초의 오페라가 시민회관(연정국악문화회관)무대에 오를 때부터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개관 준비팀으로 들어오게 된 2003년도 즈음까지 대전오페라단의 심부름을 했다.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열악한 환경에서 종합예술인 오페라를 한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오페라단의 임원들 외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도움을 줬던 사람들의 영향이 크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이 제작한 오페라 “아이다”의 스태프로 분장을 책임졌던 사람이 그런 분이었다.
15년이 넘는 동안 작품에 참여하면서 단 한 번도 사례금이 얼마인지 먼저 물어본 적도 없었고 그냥 사정이 되는 대로 달란다. 일단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먼저이지 열악한 지역단체에 돈으로 흥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분의 마인드였고, 동반하는 직원들이 10여명에 육박했지만 오페라단 측을 전혀 피곤하게 만들지 않던 분이었다.
사실 오페라 일을 하다 보면 2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들의 묵묵한 도움은 세월이 흐르면서 가슴에 더욱 각인된다.
그러면서 그분과 같이 한 곁에서 묵묵히 일을 도왔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잔심부름을 했던 무수히 많은 후배들과 15년이 넘도록 연습지휘를 하면서 단 한번도 시간을 어기지 않고 타 지역에서 달려왔던 양반.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대부분의 캐스트와 스태프들이 오페라단에서 식사 안 사준다고 은근한 불평을 하지만 그 가운데에 “식사하셨어요?”라고 물으면 “일찍 와서 혼자 자장면 한 그릇 먹었지!”하고 씩 웃으면서 연습에 들어가던 양반. 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던 밤이었다. 필자는 이제서야 소주잔을 기울이며 “선생님은 제 가슴에 담고 있는 분입니다”라는 그동안 한번도 못했던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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