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시로서 머무르기를 바랐던 시인은 시가 편법의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야합하여 매득될 수 있는 현실을 부정하며 걸어온 순수했던 길이 보람도 없이 거치른 대지를 넘어 수평선에서 멀어진 고인의 문학사랑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인이라면 고인이 쓰다만 펜 자국이 선명해 보일 거다.
평소 그의 혁혁했던 발자취와 종종했던 발걸음이 한낱 부질없었던 것이었을까. 또렷이 기억 속에 남는 그것은(?) 왜일까.
살아생전 문학에 대한 자구적인 자책을 자주 내뱉던 파르르한 그의 열정이 몇몇 사람들의 저잣거리에 놀아나고 회자되어 변변한 문학상 하나 없이 어느 이마주의 먼지처럼 가슴 속에 쌓였을 고인의 상흔.
지역 문인치고 ‘시도’ 에 이름 한 두 번 걸치지 않은 문인은 아마도 없을 만큼 지역향토문학에 애착을 갖고 동분서주 하였으니 앞선 고인의 티끝 이라도 우리지역 문인들은 자신이 그러하듯 곰곰이 생각해 가슴에 쓸어 안아볼 일이다.
중앙에 밀려 혹은 베스트 작가군 계열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묵묵히 향리에서 곤비한 필력을 경주하는 지역 시인과 시를 옹호하며 1978년 창간하여 이념을 버리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을 걸어 왔었다 알고 있듯, 흔히 말하는 지역 문학이라는 용어는 향토문학을 중심으로 로컬리즘에 입각해 농촌`해양`산악`토속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학의 근원적 원형을 가르키는 말이다
서구의 경우처럼 도시문명이나 기계주의에 반기를 들고 인간회복을 꾀하는 소위 향토문학운동이 독일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난 것처럼 노르웨이의 ‘아르네’란 산촌지역 소설과 북구 농민들의 지역문학 탐구로 노벨상을 타기도 했었다.
러시아의 노벨상작가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투르게네프의 ‘처녀지’, 펄벅의 ‘대지’는 널리 알려진 그 나라의 지역 문학이돼 세계문학이 되었던 것은 작품의 우수성은 물론이겠지만 지역인들의 향토 사랑과 그 지역을 이끌어 가는 유연한 지식인들의 역할이 현저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전후로 특히 신경림의 ‘농무’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시인 신동엽의 ‘금강’은 민중시의 표본으로 불려 지며 우리 향토문학의 원형이자 핵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가장 민속적인 문학이 세계적인 문학이다” 라고 정의한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도시에는 문학이 없다고들 한다. 속악한 유행과 포르노그래피의 퇴폐와 추악한 하수도 문학이나 양산하는 상업적인 문학 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말이 가르침으로 들리는 이유도 오롯이 지역의 문학을 위해 소신을 다한 고 지광현 시인의 애착에서도 찾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질주하는 어지러운 현상계에 가세해 편중된 중앙 문단에서 밀려나 홀대 받는 지역 혹은 향토를 변방쯤으로 여기는 근시안적인 우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고민해야 한다.
더불어 앞으로 우리지역 문학의 과제와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돌이켜 보면 오직 생명의 뿌리가 있고 민족의 혼이 깃들어 있는 지역문학 그 참된 모체인 향토문학이 모든 가능성을 일러주는 유일한 희망이기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활동했던 문인들의 발자취를 뒤 돌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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