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나 식물이 동종끼리 군집이나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거시적으로 자연의 섭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미시적으로 인간이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인위적 작당(作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밸런스가 아닌 소수의 이익집단은 다른 구성원에게 폐해를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런 류의 사람 끼리끼리 모여 유유상종하면서 자신들은 희희낙락하고 남에게는 피해와 권태를 주는 비 신사적인 태도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논어 자로 편에 군자는 화이부동(君子 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小人 同而不和)란 말이 있는데 이른바 끼리끼리 모인다는 의미로 비슷한 용례인듯 하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로 뭉친다는 동(同)의 뜻은 어떤 것끼리 뭉치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내용과 행위 결과는 지극히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모임의 성질과 목적에 따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특별히 부정적인 면에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요사이 우리는 주변에서 부당한 작당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른바 정치권에서 문제되고 있는 코드인사 등이 그 예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어울림을 관찰해보면 그들의 어울림의 모습이 각양각색임을 알 수 있다.
요즈음 영화의 단골 메뉴인 친구(?)끼리 모이는 아이들은 분명히 그런 친구들끼리 작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학생들이 학과에서 다 배우지 못하는 그 이상의 것을 얻기 위해 과외활동으로 여러 가지 동아리활동을 한다. 그들 동아리에서 그들끼리 무엇을 논하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에 따라 그들 인생은 심각하게 달라질 수도 있다. 그 동아리라는 것도 실제로는 끼리끼리 모임이지만. 건전한 모임으로 무엇인가 배우고 익힌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한편 공부를 한다는 것은 모르는 그 무엇를 배우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선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어야한다. 즉, 배운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교육은 무엇을 아느냐 보다 무엇을 모르느냐에 먼저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알게 하고 보완해 주며 잘하는 것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배우는 자가 스스로 무엇을 모르는가 조차 모른다면 그가 공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가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보다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행위 결과에 대해서도 어떤 것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자아도취에 젖기는 쉬워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실패가 더 뼈아픈 것인데도 말이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겸손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된 사람이다. 옛말에 아는 것이 모르는 것만 못하고 어설피 알고 있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것만 못하다 했지 않는가?
얼마 전 대통령께서 일부 언론인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자문한 뒤 자신의 인기도가 낮지만 그래도 과거 대통령이었던 모씨보다 지지도가 높다는 자평 겸 자위를 했다는 보도를 읽은 일이 있다. 대통령이 아니라 범부(凡夫)라 할지라도 앞에서 얘기한 대로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면 그에게 더 이상 그 무엇인가 기대한다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군자는 마땅히 잘해도 겸손해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더욱 자괴하며 민망해 해야 한다. 이런 말은 옛날 책에나 있는 경구인 세상이 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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