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동삼 한말글 사랑 한밭 모임 보살핌 일꾼 |
임금의 신분으로 글을 모르며 사는 백성을 위해 깊은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만드셨다. 휴양하러 가는 곳까지도 연구 서류만은 가지고 가셨다. 큰 고생 끝에 훈민정음을 완성 반포하셨다. 이것이 서기 1443년이다. 글자 만드는 데에도 큰 고생을 하셨지만 이 글을 펴시는 데도 난관에 부딪치셨다.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다.
“백성은 무식해야 말을 잘 듣습니다.” “글을 알면 똑똑해져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한자를 아니 쓴다면 중국한테 혼납니다.”
반대하는 신하도 많았고, 반대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그러나 자주 정신과 문화.겨레 사랑은 꺾을 수가 없었다. 한글이 태어나 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격이라면, 한문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창고 안까지 열매가 가득히 쌓여 있는 격이다.
한문 세력에 짓눌려 햇빛을 볼 수가 없었다. 한문을 배워서 권세를 누리고 사는 사람은 한글을 얕보았다. 560년이 지난 오늘날도 더러는 그런 사람이 있다.
연산군의 잘못을 한글로 써서 벽에 몰래 붙이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한글 아는 사람에게는 다 벌을 주고, 한글로 된 책은 걷어다 불태웠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입으로만 전해 오던 옛시조를 모아 책을 만들고, 고대소설이라고 말하는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등을 짓고 펴냈다.
삼강행실도 등 도덕 공부 그림책도 펴냈다. 삼강오륜가도 만들어 부녀자들이 길쌈하며 노래로 부르게 한 분도 있다. 그러나 주로 아낙네들이나 배우는 글 대우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일본 강점기에 열 한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전 5년 동안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초등학교 6년과 사범학교 5년을 보내는 사이에, 서당에서 배운 한문은 거의 다 잊어버렸다.
내 큰형은 열여덟 살까지 한문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장가들자마자 농사일을 했다. 10여년 배운 한문 실력은 그 시절의 글모음(문집)에서 엿볼 수 있다. 칠언절구라는 한시를 비롯해서 일기, 논문 등이 그 책에 들어 있다. 아흔이 넘어서 세상을 떴다.
내가 40대 시절에 큰형은 60대였다. 그 글모음을 40년 동안 읽어 볼 겨를도 없었겠지만 다 잊어버려, 한 편도 읽지 못한다고 했다. 한문뿐 아니라, 우리 형뿐 아니라 영어도, 일본어도 10여 년 정도 배운 것도 오랜 동안 묻어두면 다 잊는다.
세종임금께서 만드신 글은 한번 배우면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 글자 모양이 소리나는 곳의 모양과 같고, 예사소리, 된소리, 거센소리가 글자 모양과 소리나는 곳의 모양과 닮은 점 등이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보배스러운 글이 500년 동안이나 빛을 보지 못했다. 한문 그늘에서, 일본의 탄압에서, 이제는 영어 바람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제까지는 기념일인 한글날이었다. 올해부터는 국경일인 한글날이다. 한글을 배우는 일이 우리나라 안에서만이 아니고 외국에서도, 말은 있어도 글이 없거나, 있어도 배우기 어려운 나라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졌던 한글이 이제부터는 옥이 아니고 금덩이 노릇을 한다. 정부에서는 한글 문화가 아름답게 꽃피게 적극 지원해야 한다. 국어 능력 시험 범위를 넓혀 실력이 있는 이를 우대해야 한다.
세종과 한글이 있어 문화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큰 덕을 볼 날을 짐작할 수 있다. 인터넷 산업 발달에도 한글이 큰 구실을 하고 있다. 한글과 한글 문화 발전은 우리의 생명이요, 나아갈 길이다. 국어 순화 협의회를 자주 열고, 거기서 결정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말과 글을 나라 사랑, 겨레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도층부터 소중하게 여기자. 국어 기본법을 스스로 지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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