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달이 떠오르면 여자들은 마당에 나와 솥뚜껑을 거꾸로 걸고 큼지막하게 부침개를 부쳐냈고, 남자들은 또 남자들대로 물을 퍼나르랴 땔감을 갖다놓으랴 연신 부산을 떨었다. 어쩌면 그 시절 사랑방 깊숙한 곳에서는 밝은 기침에 담뱃대를 땅땅 두드리는 수염 깊은 바깥노인이 좌정(坐定)하고 계시기도 했을 것이다.
누런 빛 황금 들판과 미리 입어보는 때때옷으로 명일의 존재를 알려주던 추석은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꼬리를 무는 귀향객의 물결과 그들의 설레는 심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는 편치 않은 선물 보따리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외의 눈길이 추석의 한 상징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농담의 차원이기는 하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석만 없이도 살겠다”는 서민의 푸념이 가슴 한 켠에 와 닿는다.
지난 해 이맘때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추석이 즐겁지 않다고 응답한 경우가 48%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에 추석을 앞두고 실시한 현대리서치의 조사에서는 그 수치가 57%로 나타났다. 한 해 사이에 무려 10%가 늘어난 셈이다. IMF때보다 더 하다는 최근의 가라앉은 경기가 민족최대의 명절을 무색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여자들 특히 기혼여성들에게 명절을 보내는 것이 고역이 되어버린 지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제수용품을 준비하고 차례상을 차리는 일, 한자리에 모인 가족구성원들을 뒤치다꺼리하는 많은 일들이 아직은 여자의 몫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명절연휴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는 요즘에는 여자들의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일은 죽어라 해도 표가 나질 않으니 이래저래 명절을 보내는 여자들은 허리만 아프고 우울하다.
그리하여 올해 추석 전야에는 남자들도 팔을 걷고 차례상 차림에 한번 들어가 볼일이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고 온갖 재료들은 다 나와 있다고 팔짱만 끼고서 지켜볼 게 아니라, 나물을 삶아 보고 과일을 깎아도 보고 제기라도 꺼내서 마른 걸레질을 해 볼일이다. 대신 우리는 산소에 벌초를 하지 않았느냐고 목청을 높일 수 있겠으나, 예초기로 드드륵 하거나 대행업자에게 일을 맡기는 판국에 여자들만 고생을 해서야 되겠는가.
아니면 추석이 끝난 후 남은 연휴 기간을 여자들을 위해 보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한다든지 결혼 전에 자주 들르던 찻집을 찾아 차 한잔 나누는 것은 또 어떨까. 집안의 평화를 위해 그 만한 일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를 추석의 전통이 그 덕에 다시 이어지게 될 줄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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