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장 봉사로 속죄하며 부처님 가르침 받아
“돌아갈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곳이 다시 태어난 고향입니다.”명절이면 고향을 찾아 먼길 고생을 마다하지 않지만 김철수(42.가명)씨 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다.
20여년전 22세의 젊은 나이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은 김씨에게 20여년이 지난 지금 돌아갈 고향도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제2의 고향이 기다리고 있다. 오갈곳 없는 그에게 사랑과 정을 베풀어준 구룡사 부설 연꽃마을 자비원(주지 영암스님)이 그곳이다.
김씨의 아름다운 고향 이야기는 영암 스님과 인연을 맺게된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교차원에서 교도소 교학과에 문의해 가족이 없는 장기수를 찾아 영치금을 넣어주는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김씨를 알게된 영암 스님은 사형수 답지 않은 순수한 김씨의 모습에서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김씨는 22살의 나이로 폭력조직에 가담해 2명을 살인, 사형선고를 받고 암담한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도소 생활을 하던 김씨에게 95년 부모님의 갑작스런 별세 소식은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부모님의 별세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재판과정에서 2~3차례의 연락이 닿았던 형제들과도 인연이 끊기고 유일한 가족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아왔던 부모님은 김씨에게 삶의 의미였기 때문.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김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교도소 내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문제를 일으켜 10여차례의 징벌을 받는 등 자포자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김씨는 “젊은 나이에 교도소 생활도 벅찼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마음이 많이 괴로웠다”며 “돌봐줄 가족도 없다는 사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돌아갈 고향도 의지할 곳도 없던 그에게 영암스님은 가족과 같은 힘을 주게 된다.
영암스님과 인연을 맺게된 그는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삶의 자세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교도소 생활도 모범 수감자로 손꼽힐 만큼 열심히 생활했고 차량정비, 건축기사, 인쇄기술 등 7개의 자격증을 취득하며 사회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전국기능대회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삶의 희망과 의지를 찾게 된 그는 사형수에서 유기수로 감형을 받아 출소 후 영암스님이 있는 대전의 연꽃마을 자비원에서 둥지를 틀게 된다.
연꽃마을 자비원은 10년이상 장기수들이 생활하는 곳이며 연예인 불자회(회장 남일이)와 구룡사 불자회(신도회장 박장수`정광태)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씨는 이곳 자비원에서 오랜 수감생활로 지친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기도드리고, 타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지난해 12월 출소한 그는 매일 아침 7시면 정림동의 화장장에 스님과 함께 봉사활동을 나간다.
영정사진 앞에서 돌아가신 이의 행복을 빌어주고 영정청소를 하며 속죄하는 마음을 갖겠다는 취지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고 되새기기 위해 화장장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깨달음을 통해 베풀며 살아가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김씨는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봉사활동과 함께, 직업을 갖기 위해 그는 22살의 젊은 청년의 마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올 초에는 운전면허증도 취득했다.
사회와 철저하게 차단돼있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김씨에게 하나하나 배우면서 새로운 의미와 재미를 깨닫고 있는 것.
“많은 고비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힘들게 살아왔지만 도와주신 불자님과 스님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부처님 뜻대로, 스님 뜻대로 남은 인생을 알차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김씨는 제2의 고향 대전에서 ‘아름다운 인생’에 도전하고 있었다.
“마음과 몸 둘곳 제공하는 것 뿐”
‘장기수 포교’ 영암스님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지만 연꽃은 흙탕물이 들지 않습니다. 한때의 실수로 젊은 나날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된 안타까운 이들에게 흙탕물이 들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 뿐 입니다.”
장기수 포교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영암스님은 이같이 답했다.
부모와 형제 등 연고가 없는 어린 장기수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영암스님은 그들을 위해 교도소 시절부터 사식도 넣어주고, 부모처럼 찾아가기도 하며 자비를 베풀어왔다.
“처음에는 사회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적개심을 갖고 호의를 거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 하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을 맺어온 장기수들은 스님의 보살핌 속에서 사회에 나가 직업을 갖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 그 중 2명은 스님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기수들에게 소액의 정착자금을 줄 뿐 사회에 돌아가기 위한 교육시설이 많지 않은 형편이다. 임시 보호시설이 있지만 교도소의 연속선상에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많은 출소자들이 이곳을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환경탓에 출소후 정착하지 못하고 또다시 교도소 생활을 반복하는 이들이 안타까웠던 영암스님은 자비원에 생활공간을 만들게 됐다.
영암 스님은 “마음 둘 곳 있고 몸 둘 곳을 제공하는 것 뿐”이라며 “사회에 나가 바르고 정화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 “현재는 자비원에서 8명의 장기수가 생활하고 있지만 내 꿈은 100명이든 200명이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길 바란다”며 “의지할 곳 없는 장기수들을 위해 단순히 부처님의 심부름 꾼으로 이들의 친구, 아버지, 형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 ‘장기수 포교’ 영암스님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