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새로운 장(章)이 열리는 예감도 갖게 했다. 평화통일이나 남북외교는 정주영 씨가 도맡아 하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며칠만에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는 정주영씨를 환영하는 생방송도 했고 정 회장의 상기된 특별 기자회견도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충분한 연출 효과도 냈다.
며칠 후 나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5분 발언을 신청했다.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만일 정 회장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5조원 이상을 투자해서 관광코스, 호텔, 골프장, 명사십리 해수욕장 등을 개발했다고 하자. 금강산에 비행장도 건설하고 동해선 철도도 연결했다고 하자.
그러다 우리 관광객 몇 명이 억지로 북한식 범법에 걸려 억류당했다고 하자. 그 다음에도 기를 쓰고 금강산 구경한다고 올라갈 관광객이 있겠는가? 막대한 관광시설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급기야는 북한에 귀속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협력은 정부 대 정부의 면밀한 협의와 절차를 거친 당국 간의 협의도 아니기 때문에(북한정부 당국과 이쪽은 기업대표 간에 체결) 잘 되면 좋고 잘못되면 낭패를 보기 쉽다.
현대 기업자금으로 투자한다 하지만 현대의 자본은 금융권 차입자금이 더 많은데 만일 실패한다면 그 결과는 국민 부담이 되고 말 것이다. 본 의원은 이번 사태를 국회의 이름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조치를 해 줄 것을 호소한다.”
중간 중간에 원색적인 막말도 사양하지 않았다. 연설을 맺고 나니까 “잘 했어, 잘 했어!”하는 호응이 의사당을 시끄럽게 메웠다.
이튿날 이북 5도연합회 간부들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서 자기들 한테도 연설을 해달라고 졸라댔다. “국회연설 잘 들었습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었습니다.
내일 사직공원에 수천 명의 동지가 모여 집회를 합니다. 정 회장의 조치를 규탄하는 모임입니다. 꼭 나와서 국회발언과 같은 연설을 부탁합니다.” 나는 약속을 했다. 환호와 갈채 속에서 나는 대중연설을 하고 국회에 돌아왔다. 그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국회에서의 발언은 면책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 바깥에서 행한 연설은 면책특권이 없다는 것을 이 의원은 모르십니까?”
“이것이 의정활동에 대한 협박이 아니오? 나는 내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는 연설을 또 할 것이오.”
“아니오. 지금 협박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친분 있는 분이기에 한번 해 본 이야기요. 결코 존경하는 이 의원의 발언을 추궁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접어두기로 했다. 며칠 전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한분이 금강산 관광 갔다가 몇 시간 동안 인질로 잡혔고, 수백 명의 관광객과 함께 4시간 이상 억류되었다는 보도를 들었다. 일국의 국회의원을 차렷 자세로 세워놓고 복종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과문도 쓰게 했다고 했다.
수백 명의 인질을 풀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사과문을 써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8년 전에 내가 국회에서 행한 연설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구나” 하는 감회를 느낀다. 그동안 아까운 수조원의 빚을 갚아주고 뺨맞는 것 아닌가 분노해 본다.
작년에는 어느 여성이 말 꼬리를 잡혀 며칠씩 억류된 적도 있다. 수백 명의 이산가족 면회도 하루 앞두고 취소당한일도 있었다. 당국 간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건설중인 호텔건축도 이제 막 골조가 끝난 상태에서 일방적 공사중지를 명하고 작업요원을 퇴출시켰다.
도움 주는 이는 가슴 펴고 주고 도움 받는 이는 허리 굽히며 받는 것이 오래된 우리 예절인데 왜 우리는 이토록 주객이 꼬인 현실 앞에 서 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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