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 로드맵의 주요 과제는 단위사업장에서의 복수노조 허용에 따른 교섭창구 단일화, 직권중재 등 반노동조합적 규정의 개폐, 대체근로 허용 등 사용자의 대항권 강화, 기타 국제기준에 미달하는 노동관련 제도나 관행의 정비 등이었다.
그런데 3년간의 지루한 공방 끝에 노사정이 합의한 (민주노총이 합의과정에서 배제되었으니까 완전한 노사정 합의는 아니지만) 선진화 방안은 놀랍게도 이 로드맵의 출발점까지를 부인하는 전혀 선진적이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 합의의 주된 내용은 내년부터 시행하도록 되어 있던 단위사업장에서의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 금지를 다시 3년간 미루고, 필수 공익사업장에서의 직권중재를 폐지하는 대신 대체근로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중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는 후진적인 우리 노사관계를 개혁하기 위한 핵심적인 사안으로 이미 1997년에 법제화된 내용이다. 다만 노사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5년씩 두 번에 걸쳐 벌써 10년간이나 그 시행을 유예해 왔을 뿐이다.
이번 로드맵은 이제 이 법 조항의 시행을 전제로 교섭창구 단일화와 같은 후속 조치들을 그 주요 내용으로 담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법 시행 자체를 3년간 늦추기로 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노사관계제도를 1997년 이전 수준으로 회귀시키자는 합의가 어떻게 선진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될 수가 있는가?
10년이나 그 시행이 미루어져오다가 다시 3년간 미루어지게 될 법을 제대로 된 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국의 정책이, 법이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기업과 노동조합도 이 법의 시행을 전제로 자신의 행동을 준비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3년 후 다시 아직 준비가 안 되었노라고,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노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영원히 ‘여건이 성숙’되기는 어렵다. 현실에 맞지 않아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제도와 법 조항이라면 유예 운운할 것이 아니라 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옳다 (사실 그런 주장을 하는 전문가도 없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정된 법은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법과 현실의 괴리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1953년에 제정된 근로기준법만 하더라도 그 내용이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선진적이어서 상당한 기간 동안 이 법의 준수를 강요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경제여건이나 노동시장 여건이 과연 복수노조를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을 금지하기 힘들 정도로 미숙한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노동조합(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경영자총협회)라는 강력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정부의 정책을 좌초시켰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난 3년간 노사관계제도의 선진화가 참여정부 최대의 개혁과제 중의 하나임을 주장해오던 정부가 하루아침에 ‘대승적 타협’이라는 구차한 말로 노사의 이기적 담합 행위에 굴복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정부의 무능함과 허약함이 도를 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사관계 선진화를 표방한 로드맵이 결국 우리 노사관계의 후진성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꼴이 된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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