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환 전위예술가 |
회고해 보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책갈피마다 감회가 새롭다. 시가 시로서 머무르기를 바랐던 시인은 시가 편법의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야합하여 매득될 수 있는 현실을 부정하며 걸어온 순수했던 길이 보람도 없이 거치른 대지를 넘어 수평선에서 멀어진 고인의 문학사랑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인이라면 고인이 쓰다만 펜 자국이 선명해 보일 거다.
평소 그의 혁혁했던 발자취와 종종했던 발걸음이 한낱 부질없었던 것 이었을까. 또렷이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왜일까.
살아생전 문학에 대한 자구적인 자책을 자주 내뱉던 파르르한 그의 열정이 몇몇 사람들의 저잣거리에 놀아나고 회자되어 변변한 문학상 하나 없이 어느 이마쥬의 먼지처럼 가슴 속에 쌓였을 고인의 상흔.
지역 문인치고 ‘시도’에 이름 한 두 번 걸치지 않은 문인은 아마도 없을 만큼 지역향토문학에 애착을 갖고 동분서주하였으니 앞선 고인의 티끝 이라도 우리지역 문인들은 자신이 그러하듯 곰곰이 생각해 가슴에 쓸어 안아볼 일이다.
그 지역 특유의 풍습이나 습속`사상`감정을 담아 그 지역의 향토 속에 살아 숨쉬는 인간의 건강한 노동을 표현함으로써 도시문학의 퇴폐적 속악성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 주요였다. 국적을 버리면서도 진정한 지역향토문학을 추구했던 헤세의 프렌센 등은 그가 지향한 향토예술의 산물이었다.
러시아의 노벨상작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투르게네프의‘처녀지’, 펄벅의‘대지’는 널리 알려진 그 나라의 지역 문학이자 세계문학이 되었던 것은 작품의 우수성은 물론이겠지만 지역인들의 향토 사랑과 그 지역을 이끌어 가는 유연한 지식인들의 역할이 현저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전후로 특히 신경림의 ‘농무’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시인 신동엽의 ‘금강’은 민중시의 표본으로 불려 지며 우리 향토문학의 원형이자 핵심이 되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그 지역의 향토문학을 중심으로 자연 속에서 환경과 문명 그리고 문학과 싸우는 인간들의 삶을 통해 참된 지역문학의 좋은 예시가 되기에 본보기가 된다. 그렇다면 ‘가장 민속적인 문학이 세계적인 문학이다’ 라고 정의한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도시에는 문학이 없다고들 한다. 속악한 유행과 포르노그래피의 퇴폐와 추악한 하수도 문학이나 양산하는 상업적인 문학 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말이 가르침으로 들리는 이유도 오롯이 지역의 문학을 위해 소신을 다한 고 지광현 시인의 애착에서도 찾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흐르는 세월은 유수와 같고 쏜 화살촉 같다. 사색의 계절 가을, 그 문턱에 기대서면 추억에 젖고 우수에 젖고 문학에 젖기 마련이다.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질주하는 어지러운 현상계에 가세해 편중된 중앙 문단에서 밀려나 홀대 받는 지역 혹은 향토를 변방쯤으로 여기는 근시안적인 우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고민해야 한다.
더불어 앞으로 우리지역 문학의 과제와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돌이켜 보면 오직 생명의 뿌리가 있고 민족의 혼이 깃들어 있는 지역문학 그 참된 모체인 향토문학이 모든 가능성을 일러주는 유일한 희망이기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활동했던 문인들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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