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에겐 용어도 생소한 DMB와 와이브로, IPTV, HSDPA가 그 주역으로, 방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미칠 파장에 대해서는 더구나 예측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우리나라에서의 방송통신 융합 논의는 10여 년 전에 시작됐으나, 법 제도 정비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논의는 발전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논의가 규제기관의 통합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표면화된 ‘공익론과 산업론’의 갈등구조는 앞으로도 한동안 평행선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바뀌기 마련이다. 제도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선거 등을 통해 주기적으로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뉴미디어의 등장처럼 변화는 항상 갈등요인을 제공하기 마련이며 이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하고, 더구나 해법을 찾아가는 방식은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비교문화 연구서에서 서양인은 범주를 중요시하는 반면, 동양인은 사물을 독립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그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파악한다는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팬더곰과 원숭이, 바나나 세 가지 사물을 제시하고 그 중 관련 있는 2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미국의 대학생들은 동물이라는 범주에 속한 팬더곰과 원숭이를 고른 반면, 한국과 중국의 대학생들은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는다’라는 서로의 관계에 근거해 원숭이와 바나나를 고르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관계는 관점이다. 우리는 ‘다르다’와 ‘틀리다’의 사전적 정의는 엄격히 구분할 줄 알면서도 실제 관계 면에서는 ‘다름’과 ‘틀림’을 잘 구분하지 못한 채 대처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기술발전이 주도하는 변화라면 새로움이 자리를 잡을 때 휴대전화 시장에서 시티폰이 사라진 것처럼 그 태생의 발판이 됐던 과거는 묻혀 버린다.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는 논의 구조가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역대 정권들은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기에 바쁘다. 민주화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점도 있을 것이나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앞선 정권의 경험조차 제대로 탐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과거의 단절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새 시대의 원조로 부각시키고 싶은 욕심을 앞세우는 탓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문제는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에만 몰두하느라 과도한 사회비용과 기회비용을 유발하곤 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미뤄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지방정부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자리를 바꾸고 나눠주는데 의미를 부여하지, 지식이론의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학습과 체험을 통해 개인이 습득한 암묵지(暗?知)를 공유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한 자리에 오르게 되면 공자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화두로 들고 나온다. 서로가 조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관계에 주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화이부동은 어디로 갔는가를 묻고 있다.
목수가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순서대로 주춧돌부터 그린다고 한다. 최근 정년퇴직한 한 노교수의 생활신조를 되새겨 본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기를 닦기는 가을 서리처럼 매섭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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