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성남 본사 주필 |
통계청은 최근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를 토대로 234개 시.군.구 가운데 63개 시.군.구에서 65세이상 인구가 20%를 넘었다고 밝혔다. 65세이상이 20%이상일때를 ‘초고령화사회’로 규정하는 유엔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우리 사회의 3분의1 가까운 지역이 고령화사회(65세이상 14-20%)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셈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백수로 변하는 청년실업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50전후로 직장문을 나와야 하는 지금의 기업풍토를 놓고 볼때 고령화문제 역시 우리에게 닥친 또하나의 시련이자 어쩌면 또다른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고령화’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나이를 먹을 수록 경험이라는 자산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런 기대는 실제로 70이 넘어서 나라를 일으킨 대표적 두 정치인의 모습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그 한 사람은 제2차대전의 패전국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켜 전후 서독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콘라드 아데나워’(1876~1967)요 또 한 사람은 오늘의 중국을 일으킨 작은 거인 등소평(1904~1997)이다.
2차대전직후 독일의 경제`사회적 피폐현상은 패전국이 그렇듯이 이루 말하기 힘들만큼 극심했다. 암시장이 활개를 치면서 물가는 정규시장의 수백, 수천배를 능가하는 등 국민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독일을 일으켜 ‘Made in Germany’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해 라인강의 경제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아데나워다.
그는 73세라는 고령의 나이인 1949년 독일 초대총리로 부임해 14년동안 4번의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패전국 독일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아데나워는 고령임에도 열정과 믿음, 정확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발휘해 경제문제는 에르하르트경제장관에게 일임하는 한편 정치의 틀을 구축하고 서방으로의 재진입에 성공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통해 독일재건을 성사시킨 인물이었다.
오늘의 중국을 일으킨 장본인이 등소평(鄧小平)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 싶다. 등소평은 모택동(毛澤東)수하에서 공산주의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나, 3차례나 실각하거나 연금당하면서 모진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홍7군(紅七軍)의 정치위원이었던 그는 1933년 반주류(反主流)였던 모택동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차실각을 당했고,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모택동지지파인 홍위병들에게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실각하는 한편 큰아들은 학생들과의 충돌로 장애자가 되는 비운까지 겪는다.
10년후인 1976년 주은래(周恩來)수상 추도식직후 또다시 연금되는 3차실각을 겪게 되는데 그로부터 1년반만에 풀려나 73세의 나이에 비로소 정치무대에 복귀하게 된다. 다음해부터 본격적인 등소평시대가 열려 90세가 넘도록 중국대륙을 새롭게 탄생시킨 제2의 중국혁명을 성사시킨 이가 등소평이다.
생애의 3번씩이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후일을 도모한 그의 강인한 정신과 굶어죽어가는 중국인민을 살리고 시장경제를 도입해 중국대륙을 다시 일으켜세운 등소평은 75세이후부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존경받는 지도자가 흔치 않은 점에 비추어볼 때 타국의 이 두지도자는 쓰러져가는 자신들의 나라를 일으켜 세운 지도자인 동시에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같은 업적은 놀랍게도 70대부터였으니 이들의 노익장은 가히 부러운 정도를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고령화사회를 마냥 비관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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