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엔 영웅도 악당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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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엔 영웅도 악당도 없었다

플라이트 93 (오팰 알라딘, 에릭 레드맨, 벤 슬리니)

  • 승인 2006-09-08 00:00
  • 안순택 기자안순택 기자
사실적 카메라로 중계하는 9`·11의 비극
UA 93편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나





사흘 뒤면 ‘9`·11 테러’
가 일어난 지 5주년이 된다. 세계무역센터에서 만장(輓章)처럼 솟구치던 시커먼 연기는 아직도 눈에 선연하다. ‘플라이트 93’은 운명의 그 날, 지상의 항공청 및 군 관계자와 납치된 여객기 승객들이 맞닥뜨린 혼돈과 경악, 비극의 한 가운데로 관객을 인도한다.

영화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플라이트 93편을 따라간다. 당시 테러에 쓰이기 위해 납치된 비행기는 모두 4대. 두 대는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았고, 한 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펜타곤에 곤두박질쳤다. 그렇다면 남은 한 대는?

나중에 국회의사당을 목표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 비행기, 유나이티드 93은 펜실이베니아 외곽 들판에 추락했다. 비행기는 왜 목표를 잃고 도중에 추락한 걸까. 비행기 안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크레딧도 없다. 코란을 읽고 체모를 정갈하게 면도하는 젊은 테러리스트들의 숙연한 얼굴로 영화는 시작한다. 코발트빛 하늘 아래, 여행자들은 뉴저지 뉴아크 공항으로 모여든다. 뒤늦게 달려와 겨우 몸을 싣는 사내도 있다. 첫 출근한 책임자 벤 슬리니의 쾌활한 지휘 아래 분주하기만한 연방항공청. 아메리칸 에어라인 11편으로부터 날아든 메시지는 뜻밖의 것이었다. “우리가 ‘비행기들을’납치했다.”

2001년 9월11일에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논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미국의, 할리우드의 시선이라면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아직은 이르다”는 여론은 그래서 나온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선택한 접근법은 어떤 판단도 유보한 채, 그 날과 그 장소에서 벌어진 일을 가능한 한 그대로 재연한다는 것. 그는 알 카에다 조직원 재판 과정에서 법정 공개된 블랙박스를 분석하고, 유가족 100여 명과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 상황을 한올 한올 짜나갔다. 빈곳은 ‘타당성 있는 추측’으로 메웠다.

승무원과 승객, 테러범이 비행기에 오르고, 납치되어 펜실베이니아 벌판에 곤두박질 칠치기까지 거의 실시간 그대로 묘사한다. 심지어 9`·11에 간여했던 실제 인물이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감독은 관찰자의 시선을 긴박하게 움직이는 핸드 헬드 카메라에 맞춰 급박했던 순간의 긴장감을 포착한다.

‘플라이트 93’엔 주인공이 없다. 탑승객 46명이 모두 주인공. 한 명의 레바논인과 세 명의 사우디아라비아인으로 구성된 범인들이 조종석을 탈취하고 승객들을 찌르는 순간 공포에 떨던 92개 눈동자는 서로에게 암묵적 신호를 보낸다. “우리 어차피 죽을 거 뭐라도 좀 해봐요.” 왕년의 조종사, 유도선수, 의사 등이 앞장서 범인들을 저지한다. 공포를 이겨내려는 의지가 담긴 눈동자들이 빛을 발한다.

관객들은 비극적 결말을 알고 있기에 승객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안타깝다. 그린그래스 감독은 “9`·11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현명함으로 이끄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 한 명의 영웅도, 완벽한 악당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의 마지막 암전이 한층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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