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진의 충청비사> 독서의 계절을 맞이해서

<안영진의 충청비사> 독서의 계절을 맞이해서

“책 안 읽는 국민에겐 미래도 없다”

  • 승인 2006-09-07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  가을... 독서
▲ 가을... 독서
국민소득 증가 불구 독서율은 감소세
공공장소서 책 읽는 일본인과 대조적

작품 대신 연예인이 문화예술계 주도
문학 저변확대. 예술인 지원환경 필요

찜통더위와 열대야에 시달리던 여름을 딛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9월을 맞이했다. 하늘은 쪽빛을 닮아가고 말(馬)이 살찐다는 가을, 그래서 9월을 ‘사색의 계절’이니 ‘독서의 달’이라 일컬어왔다. 독서는 문자(文字)의 등장과 궤(軌)를 같이 하는 것으로 그것은 ‘지식의 보고’요, ‘양서(良書)는 인간의 스승’ 쯤으로 생각해온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양서는 출세를 위한 도구로 교양의 길잡이로 삼아온 역사성을 갖는다. 옛날 선비들은 책 앞에서 떠나지를 않았다는 것이며 무관(武官)들도 벽에 장검을 걸어 놓고 고전을 읽었다고 전해온다.


옛날, 선인들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예학 같은 걸 반복해서 읽었지만 산업화사회에 접어들며 지식이 폭발적으로 확산하자 독서경향과 공부하는 방법 역시 달라졌다. 이에 정독(精讀)이냐 남독(濫讀)이냐를 놓고도 견해를 달리하는 지경에 이르러 정독(꼼꼼히) 쪽을 권하는 게 일반적인 상황인데 독서는 깊고 폭넓게(교양) 접하라며 단편적인 지식은 위험하다는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도 ‘조그마한 지식은 위험하다(The little knowledge dangerous thing)’고 했으니 이점은 동서가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거기에 요즘은 TV와 인터넷, 영화의 급성장으로 독서율이 날로 낮아지면서 일각에선 ‘독서는 따분하다!’고 기피하는 경향을 드러내는 세상이다. 옛날엔 책을 읽는 것만이 유일한 출세 길이었으나 오늘날엔 돈을 버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는 세태로 변해 있다.

그래서 ‘존 셰필드’ 같은 이는 ‘독서란 ‘호머’ 한권으로 족하다’며 잡서(옐로페이퍼) 같은 것을 매도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독서율은 그 나라 문명척도를 말한다지만 소득이 높아진다고 해서 그것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50년대 초 한국인 소득이 80달러일 때와 1만6000달러를 누리는 요즘과 비교를 해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계수 상의 비교로는 50년대보다 400배의 소득을 누린다지만 독서율이 그만큼 상승했느냐는 질문 앞에 그렇다고 답할 입장은 아니다.

서점엘 가보면 중년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중?고교생들??소설과 시집을 찾을 뿐 나머지는 무슨 고시(考試) 문답집, 진학지침서, 참고서 등이 주로 팔린다. 한밭도서관엘 가 봐도 철학 서적이나 순문학 서적을 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거의 취직용 출제문답이나 진학용 참고서를 펼치고 있는 걸 엿볼 수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중고교학생들은 시집이나 인기소설 한권 쯤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낭만(겉멋) 같은 것은 이젠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일반적으로 베스트셀러(Best Seller)하면 명작(名作)의 대명사로 여겨온 게 사실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다. 논리대로라면 ‘노벨상’ 수상작품이 그것을 차지하는 게 순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본격작품보다는 조금은 재미있는 내용, 바꿔말하면 대중적인 것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한편으론 베스트에 오르는 건 거의 소설이며 시(詩)는 이 반열에서 뒤진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베스트셀러’의 효시는 무엇이고 또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 그것 역시 미국이었다. 미국의 문예월간지 ‘북맨’이 1895년 각 도시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신간(新刊)리스트를 작성, 발표한 것이 효시로, 이어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에서 ‘잘 팔리는 책’을 베스트셀러라 부르기 시작한데 연유한다. 요즘은 베스트를 바라보는 눈도 매우 사시적이어서 베스트셀러란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사서 읽은 책’이라느니 ‘평범한 재능으로 도금(塗金)한 묘비’라고까지 비아냥댄 이가 있다.

노벨상 수상작이 베스트 선상에 오른 것은 1938년에 수상한 ‘펄벅’의 ‘大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당시 100만부가 팔려 ‘펄벅’은 돈방석에 올라앉기도 했는데 ‘대지’이외에 ‘흑과 백’, ‘동풍, 서풍’도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유럽에서 히트를 친 것은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로 그의 대표작 ‘레미제라블(일명 불쌍한 사람)’ ‘장발장’ 이야기였다. 그는 최단 시일에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린 인물이며 그 다음은 소련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지바고’가 서방세계에서 많이 팔렸다. 팔리는 책과 독자층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변해가는 추세지만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문학이 줄곧 전 예술의 중심에 서오다 이젠 그것이 딴 곳으로 옮겨가는 징후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21세기는 영화가 문학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여론과 음악과 미술이 그 뒤를 쫓고 있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징조다. 이는 본격과 대중예술의 간격이 좁혀져 간다는 이야기일수 있지만 비문학 영역인 실용지식, 출판물이 종횡무진 활개를 치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경전(바이블)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 개신교도는 20억을 추산하며 그 다음은 중국의 ‘사서삼경’과 ‘마호메트’의 예언서, 그 뒤가 불경 순으로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전은 통계를 잡기가 어렵고 18세기부터 얼굴을 드러낸 베스트셀러는 100만부 선으로 잡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레미제라블’, ‘의사지바고’, ‘大地’ 등을 빼놓을 수 없지만 ‘한국출판계의 현황은 어떠한가? 팔려나간 부수를 따지면 이문열의 ‘三國志’,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박경리의 ‘김 약국의 딸들’, ‘토지’ 등이 단연 선두를 달려왔으며 이 작품들은 수백만부에서 1000만부를 넘보는 것으로 어림잡는다. 하지만 비문학 책인 ‘운전면허출제집’이 2000만부가 팔렸다는 데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자동차 수가 1500만대 선이라 한다면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수치다. 또 중고생들의 ‘학습전과’ 같은 것도 그 수준에 육박하는 걸로 추계하지만 이것은 문예물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리고 중견작가가 써낸 베스트셀러라 할지라도 거기엔 하나같이 대중성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70년대부터 비문학분야인 처세서, 경제 분야, 교양물이 연거푸 베스트에 올랐다.

일본인 ‘하다케야마’의 ‘이런 간부는 사표를 써라’라든가. 이면복의 ‘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 구본영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김찬경의 ‘돈 버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 등이 그 예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농경 ― 산업 ― 정보화시대로 옮겨가며 예술의 꽃이요, 무릇 예술의 중심에 섰던 문학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우리의 경우 50년대는 3만부만 나가면 베스트셀러였지만 그때는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정비석의 ‘자유부인’, 김래성의 ‘청춘극장’,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최인훈의 ‘광장’, 70년대는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80년대 김홍신의 ‘인간시장’,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화두에 올랐다. 90년대는 무명이던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지가를 올렸고 21세기에 들어서는 박경리, 조정래, 이문열, 김홍신, 최인훈 등의 작품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오랜 세월 권위(?)를 자랑해온 문학이 이제는 빛을 잃어가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그와 같은 조짐은 이미 여러 단면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영화의 위력과 음악의 대중화, 종합예술의 도약, 본격 예술과 대중예술의 접근, 이 모든 상황으로 볼 때 문학은 밀리는 추세에 놓여 있는 게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대하소설이라 할지라도 독자들은 선뜻 접하려 들질 않는다.

1~2개월에 걸쳐 읽어야 하는 대하소설도 TV에선 이를 극화(劇化), 몇 시간이면 거뜬하게 소화해내기 때문에 돋보기를 밀어 올리며 깨알만한 활자를 대하기보다는 안방에 번듯이 누워 TV를 통해 감미롭게 감상하는 세상으로 변한 탓이다. 시대적 환경이 그러한데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독서에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니까 옛 신화는 잠들었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박계주가 ‘殉愛譜’로 한창 뜰 때 전국에는 가짜 박계주가 도처에 출몰했다는 것이고 대중소설 ‘마도의 향불’을 쓴 방인근과 ‘눈 오는 날’ 등으로 알려진 사소설(1인칭)의 이봉구 등은 ‘명월관’ 기생들로부터 귀공자 대우를 받은 시대가 있었다. 시인 정지용에겐 이화여대생들이 늘 따라다녔으며 그 시대 읽을거리라면 소설 아니면 시집이 주류를 이뤘다.

요즘에는 본격 소설보다 대중적인 것이라야 먹히고 시(詩)는 전래의 서정성에 신물이 난다해서 외면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한 때는 ‘다다(dada)’경향의 것을 좇다보니 난해하다고 이 또한 식상을 일으킨 나머지 ‘난해시’는 ‘화학부호(化學符號)’라느니 ‘시인상호간의 암호문자’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 책이란 출세가도의 안내자가 아니며 여기(餘技)요, 오락쯤으로 치부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은 그러하다. 노벨상을 받은 시, 소설보다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my way)’를, 가깝게는 한류의 배용준, 대중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조용필이 시민들의 눈을 끌며 문화예술의 주도자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렇듯 문화예술권도 전환기를 맞아 성좌(星座)의 위계가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좀 껄끄럽고 고약한 일본이지만 일인들은 노소(老小)할 것 없이 독서를 많이 하는 걸로 알려져 있으며 말단 ‘셀러리맨’도 월급날이면 잡지, 소설 등 두 세권은 꼭 사들고 간다는 이야기다. 독서를 좋아하는 민족성 탓에 일본의 신문발행부수도 가히 세계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열차와 비행기엘 타 봐도 거의가 조용하게 책을 읽는 걸 엿볼 수 있다.

심지어 노점상 노파도 좌판에 쪼그리고 앉아 대중소설을 읽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을 화차 떼기로 중간 역에 내려놓을 정도의 출판호황을 이룬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야마오카(山岡莊平)’의 역사소설 ‘大望’은 일본본토 말고도 한국에서 1000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계한다.
지난 73년대 초 중도일보에 연재했던 ‘요시카와(吉川英治)’의 ‘三國志’는 이미 그때 54 중판을 인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번에 10만부를 찍었다면 540만부라는 엄청난 수치다.

그때 필자는 어설픈 솜씨로 ‘三國志’를 번역, 연재한 일이 있다. 일본에서 인기작가쯤 되면 ‘하코네’, ‘벳푸’, ‘아타미’ 등 세계적인 관광명소에 별장을 갖고 준 재벌급의 세금을 낼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작가를 영웅(?)시 하기 때문에 명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와바타(川端康成)’와 ‘오에(大江健三郞)’ 두 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또 ‘아쿠타가와(芥川)’상 발표 때면 도하신문들이 머리기사로 다루며 법석을 떠는데 이에 비해 우리 문단은 아직도 외롭고 서글프다. 거개인 중진을 제외하고는 늘 피곤한 몸짓으로 창작에 임하고 있어 안타깝다. 독서의 달 9월, 좀 더 문단과 문인, 예술인들이 마음 놓고 작품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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