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폐암수술을 받고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켰는데 그날은 딸 현지랑 함께 있었다. 창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병실 안은 가습기 증기소리만 들릴 정도로 적요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왜 엄말 신문기자 안 시키셨어요?”
아버지 다리를 주무르던 현지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당시 대전외국어고등학교를 재학 중이던 현지는 대학 진로를 고민하다가 문득 엄마 꿈을 꺾은 외할아버지 의도가 궁금해졌던 거 같다. 아버지는 잠시 조용하셨다. 나 또한 대답이 기다려졌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래. 니 에미, 신문기자 안 시킨 것 후회 된다”라고 말하실 줄 알았다.
“…네 엄마, 신문기자… 오래 못 했을 거다.” 처음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 곰곰이 되새겨보니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 있었다.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자 전율감으로 몸이 떨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회환이 밀려왔다.
“그래…. 그랬었구나….”
누구보다도 자식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부모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과 믿음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강경상고를 졸업한 후, 은행을 거쳐 검찰 공무원으로 퇴직한 뒤에는 법무사로 일하셨다. 당신의 직무에 성실했지만 매사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률’에는 그다지 큰 매력을 갖지 못하셨던 것 같다. 신문방송학과로 대학 진학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자는 무슨 기자…. 신문기자는 누군가를 파헤치잖냐. 괴로운 일이다. 교사가 되라. 사람을 만드는 교사가 최고 직업이다.”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잘 하는 것은 글 쓰는 거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교사, 그 중에서도 ‘가정과 교사’가 되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가정과였던 것은 딸이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거 같다.
당연히 ‘고루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 못했던 나는 늘 ‘가지 않은 길’을 동경했었다. 학생들이 진로상담을 해오면 거침없이 “네 인생이다. 네가 결정해라”고 말했었다. 아버지만큼 학생의 성격이나 직업의 미래까지 정확히 알고 있지도 또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너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라”고 조언(?)을 해온 것이다. 과연 그 학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니 조마조마해졌다.
그때부터였다.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두리번거리고 살아온 ‘그저 그런 교사’의 삶을 참회하게 된 것은…. 이듬해 가을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하지만 지금도 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를 일러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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