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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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골방

<문화 초대석>

  • 승인 2006-09-03 17:26
  • 윤선아 시인윤선아 시인
▲ 윤선아 시인
▲ 윤선아 시인
고은 시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에서 우연히 한하운의 시집을 주웠다. 나는 울었다. 나는 한하운이 되고 싶었다. 먼저 문둥병에 걸려야 했고, 그리고 문둥이의 시를 써야 했다. ‘가도 가도 황톳길……’은 내 운명의 구호가 되고 말았다.”

평생 자신의 운명과 이런 구호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멋지면서도 가슴 아픈 일이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결실을 얻으려면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팔방미인이어서 두루두루 잘 하여 나름대로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못한다. 시대의 풍운아, 고은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잃어야했다. 그 대가로 늙음과 명성을 얻었다.

나에게는 ‘골방의 추억’이 있다. 깡촌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나와야 했기에 서점에서 여유롭게 책을 구입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집 저집에서 굴러다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온 동화책들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 나의 독서인생의 시작이었다. 읽을 책이 부족하다보니까 같은 책을 두세 번 읽어야 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는 세 평 남짓의 도서관이 있었다. 햇빛도 들지 않고 쾨쾨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기에 학생들은 그 도서관을 ‘썩은 골방’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나는 책에 핀 곰팡이 냄새를 그때부터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방과 후 쥐구멍에 새앙 쥐 드나들 듯 썩은 골방을 찾았다. 그 때 읽었던 ‘제인에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생의 한 가운데’, ‘테스’ 등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미로웠던가.

농촌생활에서 오는 초라함과 구질구질함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책 안의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이었다. 말들이 뛰어노는 넓은 초원에 긴 드레스를 휘날리며 애인에게로 달려가는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시녀라도 되어 그 속에 합류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러한 환상은 삼십 대를 넘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내 자신이 봐도 답답할 노릇이다. 현실세계가 힘들 때마다 도피하듯 책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은 도피는 될지언정 문제의 해결은 되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그런 썩은 골방의 추억을 잊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지금의 독서와 글쓰기는 그 자체만으로 유년을 답습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유년에서부터 성장해온 내 안의 다른 세계는 이미 현실의 나와는 별개의 모습으로 자라버렸다. 한 몸에 두 세계가 들어 있는 상황에서 나는 그 두 집을 왕래하며 살고 있다. 그런 상황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듯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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