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해진 유머… 희망 담긴 결말
고현정 영화데뷔작 가볍지만 강렬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서로 닮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점점 더 닮아간다. 여행과 술, 관계맺기와 남녀의 동상이몽은 그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다.
그런 동어반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인물과 미세한 떨림을 포착해내는 섬세한 눈. 나를 닮은 인물 그리고 꽁꽁 숨겨놓은 속물근성을 끄집어내 ‘야지’를 해대니, 속내를 들킨 듯 부끄럽고, 얄밉고 한편 두렵다.
그래 놓고는 자기 연민의 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도 그래, 똑 같아. 미안해’하는 식이니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홍상수가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엔 벚꽃이 만발한 서해안 신두리 포구다.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일행이 서울로 돌아온 뒤 남자는 혼자서 다시 바닷가로 간다. 이번에는 그녀를 닮은 유부녀를 만난다. ‘안된다’고 하면서도 욕정에 이끌리는 남녀. 그 모습을 그녀가 지켜본다.
‘해변의 여인’은 전형적인 홍상수 표 영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등을 통해 선명해진 그의 색깔이 여전히 묻어난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에 그도 달라졌다. 더 이상 음지에 머물지 않는다. 홍상수의 틀 속에 있지만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과장된 몸짓 없이도 나른하지 않게 흘러간다.
해변이라는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펼치는 이야기지만 관객이 곳곳에서 낯익은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은 시시콜콜한 로맨스가 우리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골키퍼 있어도 골을 주고받고, 싫다고 하면 세게 한 번 꼬집고 뒤돌아설 줄 아는 쿨한 사이지만 지극히 사소한 문제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 인물들. 우습게 집착하고 묘하게 냉정하다.
영화 첫 데뷔를 치르는 고현정을 비롯해 김승우 김태우 송선미 등 네 배우들이 개성 강한 연기로 광채를 냈다. 능청스러운 연기의 극치를 달린 김승우, 때론 푼수같고 때론 엉뚱한 고현정, 홍상수의 맛을 제대로 낼 줄 아는 김태우, 절제가 돋보인 송선미가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룬다. 15세 이상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