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뭐요?” 위세를 보이느라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대꾸가 없었다. 얼굴이 온순했다. 맥이 풀려 있었다. “도대체 누구요? 이 밤중에 남의 집엔 무엇하러 들어왔소?”
묵묵부답이었다. “닭 훔치러 들어왔소?” 해도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너무 조용해 혹시 흉기라도 들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살펴 보았다. 그런 기색은 없었다.
“이거 보세요. 이런 야밤에” 하며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누그러졌다. 그제서야 빌기 시작했다. “백 번 죽여 주십쇼. 잘못했습니다” 얼굴이 시뻘개져 손을 비벼댔다.
“어서 나가시오” 하자 발길을 돌렸다. 두서너 발자국 가다가 뒤를 돌아다 보았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기가 찼다. 앞장서서 대문까지 안내해 내보냈다.
1968년에 세상을 뜬 어느 시인의 경험담이다. 누구나 궁핍했던 5,60년대를 살았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닭을 키웠다. 양계업자라는 농까지 들었다.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일꾼 삯도 못 줄 정도였다.
그런 집에 밤손님이 들었다. 닭소리가 시끄럽게 나니까 돈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집주인은 그때 큰소리를 쳐도 되는 입장이었다. 잡아서 넘겨도 무방했다. 그러질 못 했다. 내가 이 도둑보다 더 한 도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전혀 그렇지 않은 데 말이다. 빈곤사회에 대한 지성인의 책임감의 일단이었다. 그는 한국 시단의 가장 정직한 시인이라 회자된다.
더위가 멈춘다는 처서도 지났다. 가을이 내일 모레다. 한낮의 무더위가 여전하다. 윤칠월 탓만이 아니다. 바다이야기가 세상을 뜨겁게 달군다. 지금쯤 끝물인 바다가 새삼 논란거리다.
오가며 횟집이 참 이상하다 했다. 왜 창마다 다 도배해 놓았는가 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 다녔다. 도박 게임장이었다. 그래서 도둑질 하듯이 영업했구나 했다.
한몫 챙긴 업주는 이미 손을 뺐다. 발을 들여놓은 사람만 억울하다. 도박은 일확천금의 환상만 갖게 한다. 판돈의 몇 배를 벌 수 있다는 신기루를 좇는 짓이다. 실현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하였다. 수 많은 사람이 빠지게 만들었다. 정책의 실패다. 실책에는 당연히 문책이 따라야 한다.
세월이 하 수상해서인가. 이쪽은 규정대로 했고 어긴 건 저쪽이라 한다. 너도나도 내 잘못 아니란다. 네 탓이란다. 이런 경우에 그 시인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도둑을 앞에 두고 나는 도둑이 아닌가 물었다. 내가 더 큰 도둑은 아닌가 자문했다. 도덕성과 정직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랬기에 한 시대를 증언하는 시가 나왔다.
격조 높다는 말의 진수를 바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보게 된다. 이러한 평가는 한 개인에게만 해당될까? 아니다. 조직이나 집단에게도 적용된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책임져야 할 경우가 있다. 권한이나 그 향배에 대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면 더 더욱 그렇다. 그래야 “아! 사람답구나!” 한다.
진퇴판단은 자기결정이다. 함량미달의 패거리가 은폐와 전가에 급급해 한다. 사심만 있어 자리만 탐낸다. “내가 했소” 하며 나서야 한다. 그게 품위다. 수준급 인물이 나라경영하는 국가의 품격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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