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창간 본보 지역개발 사시로 55년 正道
정부청사 대전유치.충청은행 설립 여론 선도
신문이 넘쳐나 홍수를 이루고 있다 해서 짜증내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중앙지, 지방지, 향토지, 순보, 월간, 주간지들이 쏟아져 나왔다가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정확한 통계 잡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시대적 총아’라는 TV의 등장으로 신문 해먹기 어렵다는 소리가 나온 지는 이미 오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신문사의 경쟁(특히 광고 보급)은 ‘이전투구’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신문, 매체 영향력 단연 '1위'
언론하면, 산업사회가 몰고 온 ‘부산물’ 쯤으로 치부하는 이가 있지만 정보전달, 통신수단은 고대부터 있어 온 기능이며 삶을 꾸려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신문을 닮은 정보전달 수단은 BC 5세기경 로마(중앙)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방 집정관에게 보내는 지시사항을 손으로 쓴 ‘뉴스레터’를 효시로 보는 이가 있다. 이후 활판 인쇄물의 등장한 것은 독일의 ‘플루크블라트’에 연원을 찾는다지만 그것이 발전을 거듭하며 영국, 프랑스, 북구 등으로 전파, 근대 신문으로 거듭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동양은 어떠한가. 당나라 현종(玄宗)때 지방관료의 인사, 법령과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저보(邸報)라는 게 있었고 송(宋)나라와 청나라(淸)로 이어오며 유사한 통신수단으로 이를 활용해 왔다. 세기적 초강대국 미국은 18세기 들어 상업주의 형태의 신문을 만들면서 ‘뉴욕선’에 이어 ‘뉴욕타임’이 등장을 했다.
현재 발행부수가 많기로는 중국신문은 약 2000개에 발행부수는 약 300억부, 러시아의 ‘로서아’는 한 때 8273종에 20여억부를 발행했으나 정확한 집계를 접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러 신문은 아직도 관보 성격을 띠고 있어 논외로 한다.
이를 제외한 대신문으로서는 일본의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요미우리(讀賣)’가 있는데 이 3대신문은 550~600만부를 상회하며 시설이나 운영 논조 등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문으로 꼽힌다. 중국신문이나 북한의 미디어는 아직도 ‘당의 기관지’로서 나팔수(대변)구실을 하는데 비하면 한국 언론은 가장 민주적(언론자유)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데 이의가 없다.
시설에 있어서도 세계 수준이며 조선, 동아, 중앙은 각기 200만부 선을 넘보고 40면 이상을 내고 있어 일본 신문과 자웅을 겨루는 수준에 와 있다. TV의 등장으로 구독률이 떨어지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숨을 못 쉴 지경은 아니다. 컬러 TV가 등장했을 때 알고 지내는 일본 어느 신문 사장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TV등장 때 신문은 끝장나는 줄로 알았으나 그 나름의 영역(area)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당시 일본 ‘3대지’도 얼굴표정이 굳어졌다가 화색이 돌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신문은 속보성에서 TV를 따라잡을 수 없지만 신문은 기록성과 ‘해설’에 있어 TV에 앞설 뿐 아니라 지식의 전달, 교양 면에서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어느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믿을 만한 미디어로 ① 신문(73.1%) ② TV(68.4%) ③ 인터넷(64.2%) 순으로 아직도 선두주자라고 했다.
또 정보의 의존도에서도 신문이 70.7%, 로 앞서고 다음이 인터넷, 3위가 TV로 되어 있다. 하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친밀감에서는 TV가 단연 선두를 달리는데 거기엔 색감과 음악과 감미로운 대사, 오락 등이 있어 인기를 누린다고 할 수 있다. 신문은 사람에 따라 ‘돋보기’를 써야하고 시간이 걸리며 피곤하기 때문이라 했다.
괴테 "24시간짜리 상품" 신문 비하
신문기피증의 ‘대명사’하면 저 유명한 ‘괴테’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신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신문기자를 ‘달리는 말꼬리에 매달린 파리’라며 ‘나가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면서 ‘24시간 후면 휴지통에 들어가는 가장 쉽게 부식하는 상품’이라 매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널리 알려진 4대 시성(詩聖)의 한 사람 ‘괴테’가 그러했다.
너스레는 이쯤에서 접고 한국 언론의 효시는 어디인가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행한 조보(朝報)가 연원인데 근대적 성격의 신문은 ‘한성순보’라 할 수 있다. 1883년 개화파 ‘박영효’가 일본을 다녀와 발행한 것으로 민간신문으로는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발간한 ‘독립신문’을 들 수 있는데 순 한글판에 영문판까지 내는 당시로선 단연 ‘기린아’였다. 이후 ‘황성신문’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로 유명했지만 곧 문을 닫았다.
이 무렵 일인의 신문이 고개를 들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있었지만 태평양전쟁발발 직전 자진 폐간을 하고 해방직전 중앙엔 경성일보와 대전에는 중선일보(일어판)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동방신문’이 ‘중선일보’의 사옥을 인수, 발행하다가 50년 6.25 동란 때 폭격을 맞아 문을 닫았고 그해 8월 28일 대전일보의 발간, 이듬해 9월 1일 중도일보가 닻을 올렸다. 이 두 신문은 전시 속보판으로 경쟁했고 동반 성장해오다 73년 박정희의 철권정치에 못 견디고 중도일보는 문을 닫았다.
필자가 중도일보에 입사한 것은 59년의 일로 처음에는 문화부에 소속되어 있었고 당시 주필은 이 한용씨, 편집국장은 이 일찬씨로 골격은 잘 짜여져 있었다. 그때 지면은 4페이지로 4000부도 채 못 찍던 시절이야기다. 이때 중도, 대전 두 신문은 취재경쟁(특종)은 물론이고 두 신문은 연재물 경쟁까지 벌여 대전일보에선 ‘錦江千里’를 들고 나와 염득균, 김채진, 조철식, 정일화 등 부차장급의 화려한 필진이 나섰고 중도일보에선 ‘百濟七百年’을 필자가 집필, 외로운 경쟁을 벌인 일도 있다.
졸작 ‘백제7백년’은 나중에 일본 도쿄에서 발행하는 한양(漢陽)지에 실었다가 여러 날 밤 가슴을 조아린 일이 있다. 그 잡지사에 조총련계 자금이 유입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조연현씨 등이 조사를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물이 되어서인지 필자는 불려 다니는 일만은 면했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50년대 말 월급이 밀리자 모 편집국장이 홧김에 ‘녹슬은 太陽’이라는 소설로 사장을 매도하는 바람에 화제를 뿌린 일도 있다. 직선곡선(直線曲線) 칼럼을 싣기 시작한 건 69년 후반으로 기억되는데 1회부터 73년 문을 닫을 때까지 필자가 전담을 했다. 그것을 72년에 ‘氣球의 思索’이라는 칼럼집을 낸 바 있다. 또 한 가지, 73년초부터 필자는 일본의 역사소설 대가 ‘요시카와(吉川英 治)’의 장편소설 ‘三國志’를 번역, 연재하다 통폐합으로 문을 닫는 바람에 중단한 일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60년대 초부터 중도일보에서는 지역사회개발을 사시(社是)로 내걸고 이를 추진했는데 그 사용내용은 이러했다. ① 정부청사 대전유치 ② 서산 A. B. C 지구 간척 ③ 계룡산국립공원 추진 ④ 충청은행 설립 ⑤ 충무체육관 건립 ⑥ 가로림만(加露林灣) 조력발전 추진 ⑦ 대삼선(大三線) 철도유치 등을 들고 나섰다.
그 무렵 도민들의 반응은 차가왔고 이를 비판하는 층이 고개를 들었다. 치자의 백일몽(痴者의 白日夢)이니,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표상, 심지어 ‘사기꾼’이라고까지 매도하고 나섰다. 국가도 못해내는 사업을 일개 신문사가 무엇을 하겠느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이웅열 사장은 동분서주 여론 조성에 불을 지폈다. 여러 사업을 선도하는 데엔 청사진과 과학적인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 것을 모델로 삼았다.
필자는 그것을 번역, 이 사장의 연설, 방송문을 섰다. 60년대 상반기엔 TV는 없고 라디오만 통하던 시대였다. 이 사장은 충대 이창갑 전총장 등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는 모습을 일상처럼 보아왔다.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적지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기술자까지 초청, 현지 측량을 한 일까지 있다. 그것이 처음에는 ‘미친 소리’로 들리다가 세월이 지나 오늘에 와서는 거의 매듭을 지었거나 추진 중에 있다.
본보 박정희 정권에 강제폐간
이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다고 할런지…. 이와는 달리 필화사건도 있었다. 70년대 초기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며 박정희의 ‘유신’ 전초작업이 한창이던 시절이야기다. 자나 깨나 간첩 찾기 구호와 ‘멸공통일’, ‘때려잡자 공산도배’를 노소 구별 없이 외치던 시절, 중도일보 머리기사엔 별난(엄청난) 기사가 실렸다.
― 앞으로는 남북 간에 화해무드가 조성되며 하숙집 벽이나 전신주에 나붙은 멸공구호 같은 게 없어진다. ― 라는 충격적인 기사였다. 그날 조금은 불안했지만 어떻든 OK사인을 하고 점심을 먹고 회사 현관에 들어서려는데 건장한 사나이 두 사람이 필자 양팔을 꽉 낚아채더니 검은 지프차 안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닌가.
한동안 달린 끝에 내려놓는데 어딘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조사실 의자에 앉고 보니 어느새 그 원고가 탁자에 와 있다. “이게 당신 글씨지?” 아닌 게 아니라 기자가 쓴 원고에 화살표를 넣으며 수정한 것은 필자다. 옆방에서 새어 나오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다. “네에, 네! 안 국장 신병을 확보해 놨습니다.” 이렇듯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담배 좀 피우자고 했더니 “이 자가 제정신이 아니로군!” 눈 꼬리가 시퍼렇다. 옆방에 기자를 불러들인 듯해서 기자는 잘못이 없으니 보내달라고 했다. 모두 내가 시킨 일이라고…. 조사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취재원을 대라고 윽박지른다. 그것은 못 댄다고 함구했다.
이 사건 역시 취재경쟁(특종)에서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날밤 별에별 생각이 들어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누군가가 함정을 파놓고 허위정보를 흘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상대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 동아, 조선 등 중앙지에 같은 내용이 터져 나와 필자는 풀려났다. 그 바람에 한동안 우쭐해 한 때가 있었다.
다양한 문화사업 지역민 사랑
중도일보는 불편부당, ‘정론지’로서의 몫을 다하려 노력해왔으며 각종 문화사업에서도 이목을 끈 바 있다. ‘백마영화제’와 ‘가요제’, ‘미스산업미인선발’ 그리고 ‘3.1절 기념 전국학생문예공모’를 해서 ‘문인꿈나무’를 양성해냈다. 영화제에서 남녀 주연배우 상으로는 김진규, 최무룡, 장동휘, 김희갑, 박노식, 여배우로는 도금봉, 황정순, 문정숙, 태현실, 전계현, 신인상은 문희 등이고 가요상엔 박재란, 김상희 등이 수상했다.
학생문예공모에선 송하섭, 홍희표, 윤채한, 임선묵, 강위수, 김만석 등이 장원을 차지했으며 제 1회 수상자로는 저 유명한 이규희(대전사범)가 있다. 이규희는 60년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속솔이 뜸의 댕이’라는 소설로 당대 최고상금인 1000만원을 받았으며 ‘박화성’의 자부로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대전일보와 쌍벽을 이루며 중부권을 선도하는 매체로 양립해오다. 1973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1道1社’ 정책 앞에 대전일보에 흡수되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길 15년…. 88년 언론자유화에 힘입어 88년 9월1일 복간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복간 후 초대 이웅렬, 이기창 시대를 접고 현재 김원식 사장이 ‘정론직필’을 내걸고 중부권의 대변지로 독자를 찾아가는 신문, 그리고 사원의 ‘복지복리’를 위해 진력 중에 있다.
▲ 본보 1988년 9월 1일 속간 1973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됐던 본보가 1988년 9월 1일 속간 소식지를 발행하고 있다. |
▲ 1951년 창간한 본보는 1973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1道1社’ 정책으로 문을 닫았다가 언론자유화에 힘입어 1988년 9월1일 복간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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