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역사 인식 망각” 동아시아 분노
육.해.공 23만여 자위대 막강 전력 과시
‘평화헌법’ 정신 역행… 지속적 군비증대
군국, 팽창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가 두고두고 말썽을 빚고 있다. ‘고이즈미’총리가 지난 15일 개인자격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참배를 강행하자 한국과 중국이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정상회담도 유보하겠다는 초강수를 두고 나선데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이즈미’는 그렇다 치고 차기 총리감이라는 ‘아베’관방장관의 태도는 어떠한가. 같은 보수 강경파인 그는 신사참배여부를 묻자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자칫 총리선출 때 손해를 볼 것 같아 어정쩡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옛날 군국주의시대에는 이 신사를 궁내성[皇室]직속에 두고 예산도 그곳에서 배정, 관할해왔으며 국경일엔 천황 자신도 그곳을 참배했다. 초창기엔 이곳을 초혼사(招魂社)라 불렀다. 그러나 요즘엔 황실도 참배하는 일 없이 거리를 두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와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렇다.
전후 ‘맥아더’가 이 신사를 황실과 떼어놓으려 한 것은 군국주의 부활을 경계한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당시 ‘히로히토(裕仁)’는 1년에 한 두 차례 자위대를 사열하면서 ‘미래는 귀관들에게 달려있다’고 격려한 일도 있었다. 그것은 의례적인 행사라 치고 황실이 신사참배를 꺼리는 이유는 2차 대전 후 ‘군통수권’ 시비가 도마에 올라 하마
일부 진보파에선 당시 ‘천황의 책임론’을 들고 나와 ‘천황은 로봇인가?’ 아니면 ‘단순한 날인기(捺印器)였던가?’라는 항의가 뒤따랐던 것을 아는 이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최고통수권자인 일왕이 ‘보좌기관’인 내각에 책임을 떠넘기고 가까스로 살아남은데 대한 국민적 항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총리와 정치인들은 보란 듯이 이곳을 참배, 전쟁 피해당사국들이 크게 분노, 일본을 경계하며 외교마찰까지 빚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렇듯 교활한 일인들의 이중성에 대해 우리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한국, 대만, 만주출신 전몰자는 유족에게 알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동의도 없이 합사해 놓고 위패를 돌려 달라는데도 ‘종교법인’은 국가도 손을 댈 수 없다고 발을 뺐다. 거기에 처형된 전범, 14명을 슬그머니 이 신사에 합사시켜 놓은 일인들이었다.
필자는 1970년대 도쿄에 간 김에 ‘야스쿠니신사’를 찾아갔다가 정문 앞에서 되돌아 온 일이 있다. 첫째는 신사분위기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이유는 일제 때 소학교 동기생들이 이 신사에 합사당할 뻔 했다는 생각에 발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일제 때 우리 역사를 배우지 못한 탓에 민족이 무엇인지 조국이 어떤 것인지를 몰라 ‘소년비행병’으로 출전, 전사했다면 이곳에 합사되었을 게 아니냐는 묘한 생각 때문이었다.
전사를 하면 이곳에 합사되어 부모는 ‘유족’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엉뚱한 효도’를 생각했던 철부지 소학생들의 꿈….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신사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것이다. 어쩐지 으스스한 게 안으로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는 이 신사의 내력과 시설, 본질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이 신사는 도쿄한복판 황거(皇居) 옆 구단 언덕[九段坂]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안엔 명치(明治)이래 2차 대전 종료 시까지 전사자 246만명을 합사하고 있지만 정작 위패를 안치한 건 40만명에 불과하다. 이 중에는 한국인 전사자 2만1000여명, 대만과 만주인 희생자 2만6000여명이 합사되어 있다.
경내에는 ‘가미카제(神風)’ 돌격대원의 동상과 군마(軍馬)와 군견(軍犬)의 위령탑을 비롯 군사박물관이라 할 유슈캉(遊就館)이 들어서 있다. 그 뒤쪽에 ‘북관대첩비’가 유폐되어 있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언뜻 보기엔 우리의 국군묘지 같지만 여기에는 슬그머니 태평양전쟁을 주도했던 처형당한 14명의 전범까지 합사를 한 곳이다.
전범을 합사해 놓고 참배를 한다는 건 ‘전쟁미화’내지는 군사대국화를 꾀하는 처사라 해서 전쟁 피해당사국들은 이를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 대만, 만주 등 전쟁 희생자의 위패송환, 또는 명의취소를 요청해도 이를 거부한다는데 있다. 일본은 이렇게 나온다. ‘야스쿠니신사’는 종교재단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고 또 전사자들은 황국신민의 입장에서 싸운 장병들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일본인의 역사인식에는 문제가 있는데다 반성이나 수정은 고사하고 일관되게 ‘승자논리’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입장에 놓인 독일의 경우는 유럽의 피해 당사국을 찾아다니며 패전기념일엔 헌화도 하고 거듭거듭 사죄해온 탓에 독일은 ‘문화대국’ 예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아시아의 ‘해방전쟁’이라 떠들어대고 있다.
北 미사일 발사 쾌재 부르는 日 속내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겉으로는 북한이 금방 일본열도를 공격이라도 할 것처럼 소란을 떨고 있지만 내심 군비확충의 기회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난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은 절대 군사대국으로 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만나본(단독회견) 일본 지도층과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를 든다면 ‘오부치(小淵)’총리, ‘호소카와(細川熙護)’총리, ‘후쿠다(福田)’총리, ‘나카무라(中村弘海)’ 방위위원장, ‘이스로기(岩動)’ 참의원 정조회장, 도쿄대의 ‘사토(佐藤誠三郞)’교수, 같은 대학의 ‘가모(鴨武彦)’교수 같은 석학들도 하나같이 ‘염려마시라!’는 식이었다. ‘나가사키’, ‘히로시마’의 원자탄 폭음이 아직도 귓전을 때리는데 또다시 무모한 짓을 하겠느냐며 ‘마음놓으시라!’는 반응을 드러냈다.
당시 분위기는 그런 쪽이었다. 한.일 의원연맹 도쿄대회 취재차 건너갔을 때 ‘요코스카(옛 군항 앞바다)’에 미드웨이 미국 항모(航母)가 기항을 하려하자 일인들의 횃불데모를 현지에서 지켜 본 일이 있다. 소위 ‘비핵3원칙(非核3原則)’이라는 걸 내세우며 절규하는 대열이 그것이었다. 비핵3원칙이란 ‘핵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 사용 또한 금하며 반입과 접근초자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국방(방위)예산 0.9% 사수, 바꿔 말하면 1% 불상회를 줄기차게 외치고 있었는데 오늘에 와서 상황은 급선회하고 있다. 0.9%가 아니라 1.5%로 미국 다음 가는 예산을 쏟아 부으며 군사대국화를 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80년대만해도 ‘자위대란 군인가? 사조직인가?’라는 시각이 일본국민들 간에 심심찮게 화두에 오르고 있었다. 그 후 필자는 전부터 알고 지내는 일본 TV 군부출입기자의 안내로 자위대에 들어가 살펴본 일이 있다. 그 실상을 기행문과 칼럼으로 처리했지만….
후지산(富士山) 산자락에 위치한 육상자위대 사격장과 그 아래 밀림 훈련장을 지켜봤는데 사격장에선 요란한 총성이 울렸고 그 아래 거대한 수해(樹海)는 밀림훈련장이었다. 고지에서 내려다보면 무한대로 전개되는 천개림(天蓋林)…. 초행자가 밀림 속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숲속이라며 여기서 육상자위대는 밀림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규슈(九州)’에 있는 전차사단을 돌아봤다. 그 당시도 이 전차대는 유사시 중국대륙을 겨냥하는 것이라고 TV기자는 말하고 있었다. 이 탱크는 소련제보다 성능과 화력에 있어 월등하다며 북해도 ‘아사히가와(旭川)’에 집중 배치해 놓았다고 했다.
소련군의 상륙에 대비한 신형탱크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대마도 ‘와니우라’의 해상자위대도 돌아봤다. 이곳은 고도의 잠수함 추적기지로 외형은 꼭 ‘파이프(곰방대)’를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해저탐지기가 현해탄을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다.
일본해상자위대는 ① 소오야(倧谷)해협(사할린과 북해도 사이) ② 즈가루(津經) (아오모리-북해도 사이) ③ 쓰시마(對馬島), 등 세 곳에 집중배치하고 있다. 유사시 이 세 해협을 봉쇄, 러시아 함대를 동해에 묶어 놓겠다는 전략이라 했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이 해협을 봉쇄하면 독안의 쥐가 되리라는 계산이다.
1960년대 중공의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그 시절에 ‘사쿠라가 피어난다!’고 일본자위대의 중무장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드러내며 경고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예언은 오차 없이 적중한 셈이다.
패전 후 일본의 좌경정권은 조용했으나 60년대부터 보수정권이 등장하며 자위대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자위대의 태동은 한국전쟁(6.25)이 터지자 자위책으로 육상경비대의 조직에 이어 52년 해상경비대를 모태로 54년 자위대로 통합 발족을 했다.
자위대, 이지스함.장갑차 등 중무장
현재 육상자위대는 14만6000명, 해상자위대 4만4000명, 항공자위대는 3만5000명으로 도합 23만6000명 선이다. 한국 병력 60만여 명에 비하면 3분의 1을 약간 상회하지만 질에 있어선 가공할 무기체제를 갖추고 있다.
◆육상자위대=13개 사단에 1130대의 고성능 탱크와 730대의 장갑차, 84대의 대전차 헬기를 보유한 막강전력이다.
◆해상자위대=4척의 이지스함과 호위함 60척, 16척의 잠수함, 98대의 대잠수초계함 외에도 갖가지 수송함을 보유하고 있다.
◆항공자위대=38대의 최신형 전폭기와 F15전투기 130대, 23대의 정찰기, 13대의 조기경보기(E2C)까지 보유한 아시아 최강의 해군력이다. 질에 있어 육해공 자위대 모두가 세계최고 수준이며 특히 방위(국방) 예산은 433억 달러(1998)로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군사대국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고이즈미(小泉)’총리 집권 후엔 개헌을 서둘며 ‘야스쿠니’신사참배 강행 세계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걱정해왔다.
지난날 일본의 ‘평화헌법’은 ‘국가 간의 교전권(交戰權) 포기와 전력(戰力)을 갖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으나 이 정신과는 달리 계속 군비를 증강해왔다. 여기에는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 경제력에 걸 맞는 ‘발언권’을 갖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부터 더욱 기세를 올렸다.
그 다음에는 미국이 이를 부추겨 온데도 원인이 있지만 거기엔 까닭이 있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남진정책 앞에 미국 단독으로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어 일본을 끌어들인 탓이다. 일본은 ‘평화헌법’과는 상관없이 1991년 페르시아만에 6척의 함정을 파견한 바 있고 다음해인 92년에는 ‘평화유지군(PKO)’을 같은 해 ‘캄보디아’에 자위대를 보낸 바 있다
이쯤 되면 일본자위대는 ‘말릴 수 없는 군대’로 등장한 셈인데 여기서 자위대가 우리 軍과 다른 점이 있다. ① 자위대는 우리처럼 ‘징병제’가 아니라 ‘지원병제’이며 ② 자위대원이 사고를 저지르면 우리처럼 ‘군법’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일반재판소에서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자위대는 ‘의무’ 아닌 월급쟁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어떻든 ‘사쿠라’는 활짝 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미.일을 ‘남의 삼방’이라 하지만 일본은 때론 거북하고 아주 고약한 이웃이라는데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계절이다. <前 중도일보 주필>
▲ 야니스쿠니 사진 불태우기 |
▲ 고이즈미 처형 퍼포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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