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30년 뒤에 누군가가 그 서문을 발견했고 그 서문이 들어간 일부 판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문에서 오웰은 이 책은 분명 스탈린의 러시아를 다룬 것이지만 영국이라고 해서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썼다고 한다.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던 중`고등학교 시절 광해군은 폭정이나 일삼던 임금으로 알았다. 인조반정으로 실각하고 폭군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서는 보기 드물게 국제정세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과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당시대의 거대 담론과 맞서는 것은 보통의 용기나 철저한 지적탐구 없이는 쉽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원로 언론인 리영희 선생과 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평가받는 노암 촘스키 박사의 글쓰기는 현실을 짓누르고 있는 허상을 폭로하며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리영희 선생이 지금의 40~50대가 청년기에 분단시대, 냉전시대를 살면서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을 허물고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쳤다면, 촘스키 박사는 겉으로 평화를 내세우며 힘의 논리로 세계를 지배하고 상습적으로 국제법을 위반해온 미국의 패권주의와 국가 폭력을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래서 언론학자 마샬 맥류한은 미디어는 감각의 연장이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우리사회처럼 사안마다 서로 다른 두개의 눈이 부딪치는 일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7월 한 달은 한미FTA 체결의 득과 실에 대한 서로 다른 계산법과 진실공방이 이어지더니, 무더위가 극에 달한 8월에는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로 끝없는 공방을 계속하고 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진보라는 소리만 나오면 무조건 고개를 돌리는 경멸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여전히 진보 앞에 숙연해지는 경건파가 있다.
한 문학평론가는 오늘을 사는 한국인은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있다고 꼬집은 적이 있다. 하나는 전근대의 시간에 멈춰진 왕조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섭게 내달리는 현대의 시계다. 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어떤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고도의 경쟁주의 사회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파벌과 학벌, 연줄, 서열, 신분 같은 전근대적 비효율의 요인들이 선의의 사회적 경쟁력을 다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최근 정치권과 언론이 담론으로 제공하고 있는 현안들에 대해 리영희 선생이나 촘스키 박사처럼 철저한 지적탐구를 통해 옳고 그름을 따지며 남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왕조의 시계를 차고, 감각의 연장으로서 네편과 내편을 나누고 있지 않은가? 서로 다른 눈의 충돌들을 보면서 종종 갖는 의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고릴라와 침팬지는 닮아 보인다. 그러나 동물학자 최재천교수는 고릴라한테 “넌 침팬지와 닮았어”라고 인간이 떠들면 고릴라는 “내참, 지들이 침팬지랑 똑 같구만”이라고 할지도 모른단다. 실제로 침팬지는 고릴라보다 우리 인간과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한다니 아마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도 아니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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